내가 성경을 주관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성경 말씀으로 나의 삶을 비추어보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의 경험과 문제의식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보라 한다. 성경과 삶, 삶과 성경의 상호 조명과 상호 비평 속에서 창조적인 변화를 맛보라한다. 오늘 욥기의 본문(욥 1:13~2:10)도 이렇게 읽어낼 수 있을까?
욥의 재난의 시작은 갑작스럽고 황당하다. 일꾼들이 잇따라 세 번 욥에게 재난의 소식을 다급하게 전한다. 재난의 시작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에서보다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 모여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즐거운 시간이라서 그 재난은 더욱 잔혹하다.
"우리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가축들을 빼앗아 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겨우 살아남아서, 주인 어른께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 1:14b~15)
욥이 잔치가 끝난 다음날이면 그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번번이 제사를 드렸건만 큰 재난이 닥친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 지극정성으로 드렸던 제사와 비극적 재앙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물리적 연관성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이지만 의미론적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인가?
비극은 꼬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거푸 계속된다. "이 일꾼이 아직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서 말하였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서, 양 떼와 목동들을 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겨우 살아 남아서, 주인 어른께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 1:16). 그리고 이 재난의 소식은 17절, 18절에 연달아 반복된다.
재난에서 저 혼자만 살아남은 일꾼들은 욥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잔인하고 가혹하게, 열심히 그리고 낱낱이 주인 욥에게 재앙의 불행을 실어 나른다. 재난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악(殘惡)한 것이다. 욥은 순식간에 그의 모든 소유를 잃는다. 그런데 욥은 폐허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도 그것을 껴안은 채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그분께 경배하면서 이런 엄청난 고백을 말한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
인생을 살면서 삶을 출렁이게 하는 거센 풍랑 만나지 않는 사람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인 작은 고깃배인 우리들은 세파에 날마다 출렁인다. 닻에 매어두었는데도 뒤집히는 버거운 풍랑이 야속하게 몰아칠 때도 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김종삼, 「어부」(전문)
보통 사람은 어부처럼 살아온 기적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 기적처럼 일어날 기쁨을 기대한다. 그러나 욥의 찬양은 대재난의 현장에서 노래하는 하느님 찬양의 불가해한 극치를 보여준다. 이 극치는 가혹하고 참혹한 재앙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라는 욥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이런 무지막지한 재난을 당하고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라고요? 성경에는 이런 고백이 함부로(?) 적혀 있어 신실한 신학도가 되고자 부풀었던 가슴을 한없이 곤혹스럽고 하고 더욱 더 푸욱 꺼지게 한다. 이런 고백에 언젠가 아멘! 하고 싶어 했던 과거의 경험을 반추할 때, 그것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신앙이었던가 생각하면, 더 더욱 존재가 안절부절 아프고 서릿발이 가슴속으로 꽃이는 듯 으스스 파고든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부단한 회의와 생각을 거쳐, 존재는 생각하는 데 그 소이연(所以然)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욥은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자녀들도 죽고, 자신의 몸까지도 악성 종기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어진 재앙을 수용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불가사의한 심미적 믿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모든 육체적 고통은 지극히 작은 흔적이라도 몸의 고통이며, 고통에서는 유체이탈이 불가능하다. 모든 고통은 우선 나 자신의 것이지 너의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고유한 것이고 유일회적이며 고통당하는 자에게 절대적이며 결정적이다. 고통은 어떤 종류의 피난도 도피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경험과 느낌 중에서 고통은 가장 확실하고 절실하다. 고통은 의심하면서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자아의 확실성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고통은 가장 강렬하고 강력한 현재적 경험이다. "나는 아파(苦痛: 정신적인 苦와 육체적인 痛)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명제라고 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시간의 불연속은 강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 한 무(無)는 불가능하다. 無에 대한 담론도 고통 없이 한가하게 존재를 생각할 때나 가능하다. 고통은 생각할 수 없는, 생각 이전의 원초적이고 직접적 느낌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存在에도 균열을 내지만 無에도 균열을 낸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생각으로 존재를 지배하려는 인식론적 혹은 윤리적 자아가 아니라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애원하고 호소하는 풍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심미적 자아다. 고통당하는 인간은 신화의 세계를 산다. "경험된 세계 속의 무의미한 고통의 극히 미세한 흔적만 있어도, 경험에는 고통이 없다고 변명하려 드는 동일성철학 전체가 허위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거지가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신화는 존재한다'"(아도르노, 『부정변증법』, 286). 고통은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언어조차 파괴한다. 고통은 언어화할 수 없다. 고통의 소리는 괴로워서 부르짖는 울음, 비명소리(출 3:7), 언어 이전의 신열(身熱)의 신음소리(출 6:5)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롬 8:22)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통은 있음(有)을 무화(無化)하고 생을 파괴하지만 고통 속에서 있음(有)은 순수 없음(無, 죽음)이 되지 않고 '아픈 있음(삶)'이 된다. 고통은 '유'(有)도 '무'(無)도 '과정'(process)도 아닌 피 흘리는 '상처'이며 '恨'의 살덩어리다.
온 재산과 자녀를 잃은 형세에서, 욥은 설상가상으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성종기로 자신의 몸이 절망스럽게 허물어가는 체험 속에서도, 심지어 그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다"(욥 2:9)고 면전(面前)에서 내뱉는 목전(目前)의 저주의 극언을 듣고도, 자신의 존재를 감사함으로 받는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욥 2:10)
그의 이 고백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하나님 신뢰의 경계(境界)는 잔혹하게 숭고하고, 하나님 경외의 고도(高道)는 가없이 비장하다. 사실 이 고백은 욥과 유사하게라도 실제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몸서리치는 전율과 깊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욥 30:21), 라는 욥의 탄식이 실제 더 인간적으로 공감된다.
믿음은 이 곤경으로부터 당장 구원하지 않으실지라도(단 3:18), 주님의 신실함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지막 결기이며, 세찬 흔들림 속에서도 붙들어주는 밑바닥 뿌리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태초에 폭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순간, 위기의 순간이 그때마다 모든 태초이며 폭발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태초이고 숨 쉴 때마다 태초가 숨 쉰다.
태초에 폭발이 있었던 게 아니다.
모든 태초가 폭발이다.
태초는 단 한 번 있었던 게 아니며
과거가 아니다.
태초는 무수히 많으며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태초이다.
숨 쉴 때마다
태초가 숨 쉰다.
-정현종, 「아, 시간」 (5연)
무진장 참고 견디며 애간장 녹이며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검은 두려움의 시간,
마라의 쓰디쓴 물을 마셔야 했던 자리,
깊은 어둠과 공포에 짓눌렸던 나날,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기형도).
하루하루를 천년처럼
끙끙 앓았던 시간의 몸살만을 느끼고
살아 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모진 일이라는 생각의 감옥에 갇혀
천장과 바닥만 있는 내안의 유배지에 흰 벽처럼 앉아
움츠린 마음자리에 웅크린 어두운 그늘과
심신이 스러질 때까지 씨름하여
지우고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가까스로 어르고 달래어 보듬어 안은 채
시편을 반복해 성독(聲讀)하고
복음서를 읽고 또 읽노라면
동창으로 살그머니 올라오는 첫새벽 빛살을 타고
말씀의 한 잎이 살랑살랑 내 마음결에 날아와
살포시 내려앉아 잘랑 울리고
세미한 소리로 속살거리며 가만가만 여울지게 되어
바싹 마른 마음에 새벽이슬처럼 소롱소롱 내리고 맺혀
시나브로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아리고도 상서(祥瑞)로운 예감과
첫새벽 물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리고 감싸는
경이롭고 감미로운 그분의 세미한 소리에 감촉되고
영혼 속에 뭔가 어렴풋 심상(心象)이 떠오르면
그 주변을 조심조심 돌면서 사르고 살려
한 자 한 자 살 몸을 위해 써내려간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 두지 않았고,
주의 성실하심과 구원을 말하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미쁘심을
많은 회중 앞에서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시 40:10).
맑은 밤하늘의 초롱초롱 사막별처럼
넘치게 쏟아 붓는 눈부신 은총의 순간
(in the excessive abundance of God's Grace)
다음 이미지는 블레이크의 세 번째 도판 "하늘에서 하느님의 불이 떨어지다"(The Fire of God is fallen from Heaven)이다.
이 그림은 야훼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허락한 권세가 욥의 모든 소유에 불행과 재난으로 임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불이 떨어지고 사막의 큰 폭풍이 집을 강타하여 연회장을 삽시간에 폐허로 만든다. 사방에서 무너지는 벽 위로 이글거리는 검은 날개를 단 사탄이 만족할 줄 모르는 파괴의 욕망으로 아래를 응시한다. 사탄 뒤에는 전능자 하느님의 맑고 평화로운 빛 대신에 화살촉 같은 빛과 모서리가 예리한 벼락이 원형을 그리고 있다. 공감이 가는 화가의 놀라운 상상은 불의 혀 같은 불꽃 형상과 안개처럼 자욱한 연기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뱀과 전갈의 형상들로 나타난다.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