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아름다운 성공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12:1-3, 고린도후서 6:9-10, 요한복음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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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삽니다. 학위에 대한 꿈, 직업에 대한 꿈, 결혼에 대한 꿈, 그리고 자식에 대한 꿈 등. 아무도 자신의 꿈이 실패하기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에는 두 가지의 성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성공한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성공한 인생은 돈과 명예 등의 결과를 움켜쥔 사람들입니다.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늘 새로운 과정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성취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정직한 노력으로 얻어내는 승리와 영예는 값진 것입니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연줄과 특혜로 이루어진 우물 안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갖은 불리함과 차별을 딛고 실력 하나로 이룬 '깨끗한 성공'은 정말로 빛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등은 언제나 하나뿐, 최선을 다하고서도 우승하지 못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세계 정상이라 하더라도 오직 그 분야에서 잠시 영웅일 뿐, 스포츠나 연예나 사업의 승자가 곧바로 인생의 승자는 아닙니다. 돈과 권력과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그만큼 행복해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공했다는 말을 '떴다'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떴다는 말은 출세했다는 말입니다. 나갈 출(出), 세상 세(世), 곧 세상으로 나선다는 뜻입니다. 세상으로 들어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출세했다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떴다'라는 것은 삶에서 뿌리가 들떴다는 것, 그러니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동떨어져 군림하는 위치에 섰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떴다'라는 것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죄가 될 수도 있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앙상하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뜨기 위해 경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경쟁 상대는 과연 누구입니까? 깊이 살펴보면 사실 경쟁 상대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목적은 누구와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행복해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나눔에 무슨 경쟁이 있겠습니까?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고 함께 나누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승리, 공동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뢀프 왈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자주 그리고 많은 웃는 것 /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건강한 아이를 낳든 /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사람은 그가 응시하는 것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바라보는' 어떤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응시합니까? 누구를 바라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목표로 삼고 싶고, 닮고 싶은 롤모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인생이라는 집을 나사렛 예수라는 주춧돌 위에 짓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이신 그를 따라 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고난 받는 이웃을 향한 무조건의 사랑과 자비와 참다운 행복을 가르치신 나사렛 예수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응시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 삶을 "온전하게 하시는 이"(히브리서 12:2)이기 때문입니다. 혼탁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다시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읽어봅니다. "주인이라 말하면서 당신께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빛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생명이라 말하면서 당신을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롭다 말하면서 당신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당신을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부자라고 말하면서 당신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롭다 말하면서 당신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하다 말하면서 당신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의롭다고 말하면서 당신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흉내 내기와 닮아가기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흉내 내기는 쉬워도 속까지 닮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현대사회는 스타를 흉내 내는 시대입니다. 무비 스타, 팝 스타, 스포츠 스타 등. 현대인들은 수많은 스타를 만들어내어 그들을 숭상하며 삽니다. 사실 현대인과 스타는 공생 관계입니다. 대중은 스타를 필요로 하고, 스타는 자신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 대중의 인기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고 그들의 의상, 머리 모양, 화장, 어투, 몸짓 등을 흉내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타에 대한 현대인의 열광 이면에는 한 가지 똑같은 욕구가 숨겨져 있습니다.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하려는 욕구입니다. 현대인들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성공은 능력만을 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능력이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거기에 '운'이 따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능력과 동시에 '행운'을 갖춘 극소수 사람에게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없는 경쟁에 뛰어들기보다 차라리 쉬운 방법으로 대리 만족을 구하려 합니다. 바로 스타가 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의 성공이 마치 나의 성공인 것처럼 만족감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스타의 행운과 성공을 자신의 것인 양 느껴보기 위해 스타들을 흉내 내면 낼수록 내면의 공허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아무리 흉내를 내더라도 스타들의 행운과 자신의 운명이 결코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흉내 내기에 시간과 정열을 바치면 바칠수록 허전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래서 마치 마약처럼 더욱 강한 자극과 더욱 화려한 도취가 필요하게 됩니다. 유명 인사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는 파파라치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러한 대중의 요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비관적으로 말해, 이제 현대인들은 스타들과 자신이 결코 닮을 수 없다는 본질적인 절망을 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닮을 수 없는 흉내 내기'가 계속될수록 내면의 허망함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삶의 기초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어디에 동일시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닮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정말로 닮아야 할 분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까? 그분이 예수입니까? 그러면 왜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주위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까? 예수를 흉내 내는 사람은 많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혹 그가, 어느 뮤지컬의 이름처럼, "Jesus Christ, the Super Star"이기 때문일까요?

원래 스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대중과의 거리, 일상과의 격리입니다. 이웃집 평범한 아저씨나 아줌마 이미지로는 스타가 될 수 없고 또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스타는 친근한 사람이 아니라 '신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대중과 철저히 격리되어, 그리고 일상의 삶과 완벽히 분리되어 베일에 싸여 살아야 스타는 스타로 남습니다. 우리의 비루한 일상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스타는 더욱 숭배를 받습니다. 더욱 흉내 낼 가치가 생깁니다. 즉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돼야 스타는 스타인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수퍼 스타'이기 때문에 그를 숭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닮을 수 없는 흉내 내기'만 계속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수업>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작자 미상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그 말씀을 글로 적어 놓으리까?' 안드레아가 말했다. '그 말씀을 잘 새겨 둬야 할까요?'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가지고 우리끼리 시험을 쳐볼까요?' 빌립보가 말했다. '우리가 그 뜻을 잘 모르는 경우 어떻게 할까요?' 바돌로매가 말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할까요?' 요한이 말했다. '다른 제자들한테도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마태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 떠날 건가요?' 유다가 말했다. '그 말씀이 실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께 강의계획안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공하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신약의 한 서신은,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리서 12: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신앙의 낭만성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무방비의 낭만'입니다. 우리는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처세술을 동원하고 두 겹 세 겹 자기방어의 울타리를 칩니다. 하지만 그분은 한 가닥의 술수도 자기방어도 없이 유유히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마지막 때가 되면 제자들이 핍박을 받아 공회에 잡혀가겠지만 "대답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령께서 반박할 수 있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방어의 처세술을 가르치지 않았으나 언제나 담대하고 침착하셨습니다.

둘째로 '무소유의 낭만'입니다. 사람들은 교인이 되면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으나, 성경에서 그분은 한 번도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는 자가 겪게 될 핍박과 고난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언젠가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물었을 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떠돌이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재산목록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물질적 유산은 아래위를 통으로 만든 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2천 년의 인류 역사와 오늘날 25억 인구의 마음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무교육의 낭만'입니다. 지금은 학위와 자격증, 하다못해 무언가 남다른 경험이라도 있어야 밥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약간의 목수 경험밖에는 없는 무학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어리석음이나 아집을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식자우환(識字憂患)의 병폐를 깊이 통찰하셨습니다. 그래서 높은 지식을 숭상하고 많이 배웠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완고하고 우매하기만 한 편견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질타하셨습니다. 이런 무학(無學)의 예수께서는 겨우 3년의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 지성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분은 시 한 수 지은 적이 없으나 단테, 밀턴과 같은 세기적인 시인들의 시상(詩想)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분은 노래 한 곡 짓지 않으셨으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바흐, 멘델스존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은 수많은 성가, 심포니, 오라토리오로 그를 찬양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장대한 국면치고 나사렛 시골 출신인 이 무학의 목수에게 영향을 입지 않은 국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그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2:9).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진실성을 의심받고 지탄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런 자기방어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그 모든 것을 가진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그 예수를 닮아 사는 것이 서로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신약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린도후서 6:9-10). 여러분은 이런 모습의 삶을 사십니까?

산행을 좋아하시는지요? 저도 종종 홀로 산행을 떠납니다. 훌쩍 떠납니다. 그런데 산행을 하다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짜로 산을 아는 사람은 '등산'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입산' 한다고 말합니다. 더 높은 곳으로 경쟁하며 오르는 것을 등산(登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산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것은 입산(入山)이라고 합니다. 산속으로 들어가 안기려면 지극히 작고 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발뒤꿈치로 자기 뿌리를 꾹꾹 딛고 꾸준히 걸어야만 푸른 산 기운을 받아 오를 수 있습니다.

출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떴다'라는 것이 삶에서 뿌리가 들뜬 것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공을 위한 노력 못지않게 그것이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를 늘 성찰해야 합니다. 성공한 힘으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나의 성공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에게는 무슨 의미일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만약 나의 인생길에서 내가 승리하기 위해 경쟁해야 할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나의 진짜 경쟁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나'일까요? 사랑은 치열한 것인데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키우지 않고 게으른 자기 한계 안에 머무는 나, 세상도 사람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낡은 원칙만 쥐고 변화를 거부하는 나, 어제 이룬 것을 누리려고만 하고 다시 새길 떠나기를 주저하는 나, 바로 이 나 자신이 나의 진정한 경쟁 상대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사랑의 크기를 넘어선 성공이라서 / 그만큼 시간 따라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 능력을 키워가지 않는 사랑이라서 / 그만큼 시간 따라 앙상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 우리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지만 / 우리의 무능은 우리의 죄일 수 있습니다 // 사랑은 치열한 것입니다 // 사랑만큼의 실력을 / 사랑만큼의 투혼을 // 사랑을 하기 위한 힘 / 순수한 힘을!" [우리는 길러야 합니다.] (작자 미상의 글, <아름다운 성공>)

그리고 우리는 다시 믿음의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새 길을 떠나야 합니다. 어제 이룬 것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떠났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자기의 결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무어라 평가할지 상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다만 부르심을 받고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성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이 여정으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2:1-3).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떠나야 합니다. 아메리카나 인도네시아로가 아니라 "나의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나의 아집과 편견과 게으름과 불신앙의 만족에서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브라우닝의 말처럼, "제일 좋은 것은 아직 앞날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의 시작은 그것을 위해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을 읽어드립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설계와 성공에의 꿈의 초석을 어디에 놓고 계십니까? '성공한 인생'이 되기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인생'이 되십시오. 성취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꿈을 결과에 따라 판정받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히브리서 12:2). 그를 응시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닮아가십시오. 예수 닮기를 원하십시오. 흉내 내는 곳에는 늘 공허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닮아가는 곳에는 늘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를 따라 새해 믿음의 여정을 새로 떠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셨습니다. '성공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모욕이고 어리석음이고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삶 그 자체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과 진리, 생명과 구원의 성취였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공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올해를 마칠 때, 또 중요한 일을 끝낼 때, 나아가 우리에게 주신 이 생을 다 마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의 축복을, 그리고 사랑의 소명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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