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장학사가 어느 학교 교실에 들어가서 교탁에 놓여 있는 지구의를 보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지구의가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요?" 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마도 '지구의 자전축은 원래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자리에 앉은 학생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안 그랬는데요." 책임을 추궁당할 위기에 처한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이며 "너희같은 악동들이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라고 책망했다고 한다.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우리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을 두고 누구도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욕심 사납기 때문이고, 세상이 위험해진 것은 난민들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이렇게 혼미를 거듭하는 것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이분법은 내 편 만들기에는 유리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영 무능하다. 무능이라면 그런대로 견딜만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이분법이 세상을 더욱 조각내고, 갈등을 심화시키고, 타자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더욱 앗아간다는 데 있다.
사실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 속한다. 인류의 첫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남자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를 만난 것 같은 감격을 담아 말한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살도 나의 살, 뼈도 나의 뼈'.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이 고백 속에 담긴 것은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나의 있음은 바로 너의 존재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아닌가?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인간은 이런 존재였다. 성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발화한 첫 문장은 사랑의 고백이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모든 것이 변했다. 왜 금지된 일을 행했느냐는 여호와의 책망에 남자는 슬그머니 핑계를 댄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제게 줌으로 제가 먹었나이다". 남자는 여자를 넘어 하나님까지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도 뱀의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 말함으로 자기 책임을 면하려 한다. 사랑의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원망의 말이었다. 말의 타락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타락한 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는커녕 사람들 가슴에 건너기 힘든 틈을 만든다. 권력으로 변한 말은 힘 없는 이들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히기도 한다.
말이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슬픔이 크다. 희망은 어디 있나? 말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류의 첫 사람들의 행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성경은 실낱같은 희망의 가능성도 열어 보인다. 죄의 결과 남자와 여자와 뱀은 각각 땀 흘림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 흙을 먹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선고받는다. 그 큰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인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죄로 인해 불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했다. 씁쓸했을 것이다. 시르죽어 지내다가 문득 개체로서의 자기 생명은 유한성 속에서 소멸하겠지만, 생명은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여자를 비난하는 일을 그만 두고 그 여자에게 존귀한 이름을 부여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거룩한 이름 아닌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을 통해서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역사의 어둠만 가중시킬 뿐이다. 불의는 불의라 말하고, 어둠은 어둠이라 말해야 하지만, 사람을 경멸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경멸과 혐오와 원망의 말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절망의 어둠을 넘어 자기 파트너를 '하와'라고 호명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아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홀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등 돌렸던 이웃들이 마주보게 될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비난을 멈추는 순간 빛이 우리 속에 스며든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