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는 말대로 그 사람의 존재가 다 드러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학자들은 사람의 말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말이 그 화자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말은 그 진실성이 입증되어야 비로소 진정성을 가진다. 그런데 말의 진실성을 지키려면, 사람은 말과 자기 존재를 일치시키려는 반성적 노력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과 존재는 어긋나고 분리된다. 사람의 존재는 행위의 연속성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말과 행위와 존재가 일치하려면 율곡의 말대로 신실함, 곧 성(誠)이 있어야 한다.
목사치고 말을 멋있게 하는 훈련을 안 한 사람이 있을까? 말을 사용하는 지도자라면 그는 멋진 표현, 멋진 이야기를 찾거나 만들어 낸다. 하지만 말과 존재의 거리를 일치시키는 자리가 행위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나 말보다, 그의 행위에 우리가 더 많이 주목하게 된다. 말을 앞세우며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심지어 정반대의 행위를 하면서도 말은 잘 하는 기만적인 인간도 있다. 그러나 언행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사람을 향해서는 실실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지도자 급"의 사람 중에는 말과 행위, 존재가 심각하게 분리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 주변에서 입으로는 매우 너그러우면서도 행위로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 자기 집착이 강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쉽다. 기독교 신자치고 목사에게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진실하게 존재와 행위, 말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온 사람이 아니라면 존경을 받으며 목사로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
조국 전 법무장관을 끝없이 괴롭히던 윤석열 검찰이 사용하던 상투어가 "법과 원칙"이었다. 법과 원칙이라는 의미가 그의 행위나 그의 존재와 일치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조국을 잡기 위해, 조국의 아내, 조국의 동생, 조국의 딸, 조국의 아들을 이 잡듯 뒤지며 인디언 기우제 지내듯 수사를 했던 검찰이 걸핏하면 외쳤던, 그 "법과 원칙"을 지켰다고 보는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늘 윤석열은 또 하나 멋진 말을 했다. 그는 "검찰에게 정치적 중립은 생명과 같다. 정치적 편향은 부패와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검찰에게 정치적 중립이 생명과 같다니 조금은 의아한 소리다. 그는 전국 지검장 회의에서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의 이 언급이 진실성을 가지는 것이려면 정치적 셈법이나 이해관계 없이 검찰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행위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과거 행적을 보는 관점에서 그는 이미 정치적이었다. 총선을 반년도 안 남은 시점에서 그간 묵혀 두었던 사건을 꺼내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줄줄이 기소해 두었기 때문이다. 총선 이전에 옳고 그름이 판별될 리가 만무하다.
이런 그가 정치적 중립을 검찰에게 요구하는 행위 역시 나는 정치 행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검찰에게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선언을 했으므로 나에게 중립을 위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 안 된다"라는 의미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특정 정당을 편드는 행위를 했던 이도 전 검찰총장이었다. 그가 법과 원칙을 몰라 그런 선동적 주장을 했겠는가? 그 역시 공적 언어와 사적 행위가 달랐을 뿐이다. 윤석열 검찰도 그런 부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애쓸 필요가 과연 있을까? 아니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정치적 선호도에 따라 수사 대상을 가려가며 정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일까 싶다. 어느 한 편에게는 없는 의혹도 만들어 기레기들을 동원하며 여론 재판을 불러 일으키는 검찰이 되고, 어느 편에게는 의혹이 제아무리 많아도 수사조차 안 하는 검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1)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부패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가 자기 존재를 구성해온 과거에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부패되지 않았어야 이 말은 참이 된다. 그래야 말이 행동과 그의 과거 행적이 담긴 그의 존재와 일치함으로 힘을 얻는다. 이 경우 그의 수하들은 그 의미를 바로 새길 것이다.
2) 그런데 과거 행적을 보면, 나경원은 수사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심지어 한 편으로는 국회 선진화법을 어긴 자들을 거의 방관하면서,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조국 가족은 일망타진하듯 수사한 "편파 행위"를 한 그의 존재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선거 전에 "울산 시장 하명 수사"라는 올가미를 만들어 놓은 존재가 누구인가? 검찰이 만든 올가미를 근거로 비열한 야당은 대통령 탄핵의 빌미로 이용하려 안달이다. 검찰이 만들어 준 올가미다.
3) 그러므로 윤석열 검찰의 과거 행적을 담고 있는 존재로는 도무지 뒷받침 되지 않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부패한 것이다"라는 말은 빈 소리다. 오히려 우린 입으로는 "법과 원칙"이라 말하고 행동으로는 "선별적, 선택적 수사"를 해왔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공적 언어와 상관없이 "행동해라"라는 의미만 남는다.
아비 게가 옆걸음질 치면서 새끼들에게 "똑바로 걸어라"라고 해 봐야 새끼 게들이 어떻게 걷겠는가? 다 같이 옆걸음질 치지 않겠는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사람의 말만 듣고 그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지 못한다. 더구나 진실을 말한다 하여 그의 존재가 진실한 존재라고 더욱 믿지 못한다. 임은정 검사가 멈춤 없이 검찰 내부를 고발하고 있음에도, 검찰 내 범죄자들이 승승장구하도록 놓아두면서 "법과 원칙"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나경원 주변의 비리 의혹과 윤석렬 검사 가족 비리 의혹은 서로 친소관계를 이용하여 "봐주기 특혜 관계"로 회자되고 있는 항간의 무성한 소문은 모른 척하면서 "법과 원칙"을 적용할 대상을 따로 두고 있다면 그의 말대로 중립을 잃은 편파요, 부패 그 자체가 아닌가? 부패한 자가 부패를 염려하는 아이러니다. 아무리 바르게 말을 한다할지라도 그의 행위와 존재가 말의 의미를 보증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그저 남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전락한다.
최근, 기윤실이 밝힌 한국교회 신뢰에 관한 설문 결과가 매우 충격적이다. "목사의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가는가?"라는 질문에 68%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다. 비종교인들은 70% 이상이 부정적으로 답했다. 설문에 답한 사람 중에서 89%가 가짜뉴스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왜 기독교인들이 가짜 뉴스에 시달리고 있을까? 그것은 목사라는 사람도 믿기 어렵고, 신자들이 회자하는 말의 내용도 믿기 어렵다는 뜻이다. 목사의 세계, 신자의 세계가 공히 거짓에 오염되어 기독교 영역이 극도로 오염된 말의 공해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말의 종교가 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실한 말을 잃으면 말을 사용해온 종교는 종말에 이르게 된다. 광화문의 종교가 그 말단 증세를 보이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의 질서를 위하여 인간의 외적 삶의 질서를 규율하는 것이 법이라면, 인간의 내면세계의 질서를 규율하는 것이 종교라고 보았다. 실정법이 인간 외면의 영역을 바르게 규율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인간 내면세계의 질서를 담당하는 도덕신학의 힘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실정법과 종교가 상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는 두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두 기둥이 거짓으로 썩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법도 못 믿겠고, 종교도 믿지 못하는 실정이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 서 있던 무화과나무처럼 말만 그럴 듯하고 무성할 뿐이다. 법이 병들고 종교가 병든 세상이 건강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건강하지 못한 세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말과 행위와 존재의 일치를 일깨워주는 도덕 신학, 도덕 철학의 빈곤이 불러온 결과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이곳저곳에서 진실한 사람이 공격을 받고, 추방을 당한다. 의로운 이들이 없는, 불법자들의 세상,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주민들이 겪었던 비극이다.
※ 이 글은 박충구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