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교회를 부탁해"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26:30-33, 베드로저서 2:9-10, 마가복음 15:3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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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작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어느 날 서울역에서 실종된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엄마를 잃어버립니다. 엄마의 걸음걸이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혼자서 성큼성큼 걷는 습관 때문입니다. 지하철을 혼자 타버린 아버지, 엄마는 그렇게 가족과 이별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엄마의 부재 속에서 자식들은 우왕좌왕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큰아들의 첫 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막내딸의 집을 들여다봅니다. 새가 되어 딸의 집을 내려다봅니다.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 자식을 키우느라 분주한 딸을 보면서 엄마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립니다. 사랑했노라고. 엄마는 또 고향 집에 기죽어 있는 남편에게도 당부의 말을 하고 돌아섭니다. 급히 떠나느라 미처 못 한 당부를 하기 위해 엄마는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작별을 고합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엄마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족만 바라보고 평생 고단하게 사는 엄마, 처음부터 엄마였다고만 생각하는, 그래서 헌신과 희생만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엄마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엄마들은 나이가 들어 거동을 못 할까 봐, 치매가 올까 봐, 혹여 그런 일들로 자식들을 힘들게 할까 봐 염려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날 지켜준 세월만큼 이젠 엄마를 지켜드릴게요. 작가는 엄마가 있는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엄마를 부탁해요.'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교회를 부탁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비유했습니다. 신앙을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다고 했습니다.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도 교회를 어머니에 비유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지금 길을 잃었습니다. 엄마 같은 교회가 지금 아픕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인총회를 통해 뽑은 새 임원들의 헌신예배를 드리는 오늘 말씀의 제목이 "교회를 부탁해"입니다. 사실 김민석 작가가 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웹툰 사이트에서 '에끌툰' 혹은 '러스트'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연재 중인 작가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만화를 계속 그려왔고, 『마가복음 뒷조사』와 『창조론 연대기』 등의 수작(秀作)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자녀들에게, 혹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신앙인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들입니다.

리처드 하버슨(Richard Habourshon)이 쓴 짧은 글, <교회의 변질>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맨 처음,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관계를 가졌다. 이 관계는 그들과 그들 주변의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 다음, 교회는 그리스로 건너가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나중에, 교회는 로마로 넘어가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 교회는 유럽으로 퍼져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실시한 <202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일반 국민의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땅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결과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율은 63.9%입니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한국교회를 별로, 그리고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년 전 같은 단체의 여론조사 때 불신율 51.2%보다 12.7%나 증가한 수치이며, 7년 전의 44.6%보다는 20% 가까이 높은 수치입니다. 종교인을 제외한 무종교인의 응답만 추리면 더욱 참담합니다. 불신율이 무려 78.2%로, 종교가 없는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가장 신뢰하는 종교' 항목에서 개신교는 가톨릭, 불교 다음으로 꼴찌를 기록했습니다. 민족의 희망이던 교회가 외면받는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1900년대 한국의 개신교인은 약 20만 명, 당시 인구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 약 1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세계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도의 열심도 있었지만, 한국교회 안에 이 나라를 이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고당 조만식, 남강 이승훈, 그리고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 등, 존경받는 민족 지도자 중 알만한 사람은 거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의 백성은 교회를 통해 민족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르게 인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진 지성인과 젊은이가 부쩍 늘었습니다. 젊은 층 10명 중 한 사람만이 신자입니다. 교회에 실망해 나가지 않는 일명 '가나안' 성도는 200만 명을 넘었습니다. 대신 이단사이비 종파가 활개칩니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 너희 날 지혜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 너희 날 부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으니, / 그런즉 너희 /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독일 뤼베크 성당의 낡은 돌판에 새겨진 시입니다. 몇 주 전 공동기도문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를 전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교회 밖 전도가 아니라 교회 안 전도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를 오해합니다. 전도가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줄 압니다. 하지만 전도(傳道)는 글자 그대로 도(道)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오는 것은 전도의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전도는, 오늘 함께 읽은 교독문 에베소서 4장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즉,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이고 전도의 완성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이렇게 전도가 되지 못한 교인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도를 외부인들에게만 적용했지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회 밖 전도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 안 전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 속으로 부르셨다." 그 '새로운 삶'이 바로 성서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인 둘이 아니라 하나인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알면 사랑한다 했습니다. 사랑하면 실천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런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 받은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전도가 완성된 게 아닙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고 /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그것을 살아야 하고 /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선을 행해야 합니다"(A. 디니,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갈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교회에 간다고 / 우리가 저절로 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의 행위로 표현하도록 /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 우리가 서로의 존엄과 긍지를 지켜주며 협력할 때 / 이 세상은 우리를 알 것입니다. /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태도로 /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크리스탈 시길 리스투른드, <참된 기독교인>).

이렇게 사랑과 순명(順命)의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결코 '위선적 회심자들'이 있을 수 없는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서기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공인한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찬란한 순간이지만 두고두고 교회의 본질을 위협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직자들이 세례를 받으면 지위와 계급을 올려주었고, 평민들이 세례를 받으면 한 사람당 금 20조각씩을 지급했습니다. 또 성직자들을 군대처럼 서열화하여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맨 위에, 그 아래는 주교들이, 또 그 아래에는 사제들이 차지하는 계급 구조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모든 사회적 의무를 면제시키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성직자'란 직책이 '사회특권층'이 되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미끼로 개종자를 늘리고 성직자들을 유혹해 제국 통치의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4세기 동방교회의 지도자이자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는 이 현상을 지켜보며, "이것은 엄청난 수의 위선적 회심자들을 만들어 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교회는 더 이상 사도행전이 기록한 초대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라는 초대교회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제도가 아닙니다. 건물이기 이전에, 제도이기 이전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회중'(會衆, congregation)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무리입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세상과 달리 차별이 없고 귀천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곧 나의 친구"(요한 15:1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자리로 내려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 안에 세상에서처럼 돈과 권력에 따라 사람이 구분되고, 차별하는 계급과 같은 직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500여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선행(善行)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稱)해진다는 구원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만인사제설(萬人司祭設), 즉 교회에서 계급을 없애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는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중세교회에서 '성도'는 하늘에 있는 성인만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땅에 있는 모든 신자로 해석했습니다. 즉 루터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모두 성인이고 또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이런 종교개혁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26장에는 성막(聖幕, tabernacle)을 만드는 일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나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모세에게 성막 만드는 법을 일러 주시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나님이 '예술가'인가 싶고, 아카데미 4관왕 '봉테일' 감독보다 더 '디테일' 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cherub - 히브리어 케루브 כְּרוּב), 즉 천사들(cherubim)의 모양을 정교하게 수 놓은 휘장(揮帳, curtain - 히브리어 예리아 יריעה)으로 길이 약 18m 너비 약 13m의 성막을 만들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다시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휘장(히브리어 파로케트 פרכת)을 만들고 그것을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언약궤, Ark of Testimony)를 그 안에 들여놓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출 26:33)라고 하십니다.

이 구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성소의 휘장 안에 함부로 들어가다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레위기 16:1). 그래서 제사장 아론이 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모시로 만든 거룩한 세마포(細麻布, linen tunic) 속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세마포 띠를 띠고, 세마포 관을 쓰고, 수송아지를 속죄제물 드리고, 숫양을 번제물로 드린 후, 향료를 가져다가 그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서야 비로소 휘장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6:2-13). 그렇게 휘장 안 지성소는 절대적 공간이었습니다.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레위기 21:16-24, 즉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이 상한 자")는 더욱이 절대 들어가지도 못하며 가까이 하지도 못할, 분리되고 차단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휘장으로 나뉜 여러 구역이 있었습니다. 제일 안쪽 깊숙한 곳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었고, 그 바깥에는 일반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 뜰, 이스라엘 여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직업과 성별과 민족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곳과 들어갈 수 없는 곳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 구별과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성전 휘장이었습니다. 휘장 이쪽과 저쪽은 교류가 금지되었습니다. 휘장은 그렇게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가리개고 칸막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단 당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모든 공관복음서가 보도합니다(마가 15:33:38, 마태 27:51, 누가 23:45).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폐하시고 갈라진 것들을 하나의 새 존재로 지어 서로 화평하게 하고 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에베소서 2:14-16). 더 이상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도 위계질서도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히브리서가 증언하듯이, "우리가 [이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히브리서 10:19-20)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몸을 찢어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증언대로,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휘장 안으로 앞서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히브리서 6:19-20)이 되어 (혹은 "하나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히브리서 10:21]이 되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히브리서 10:14)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벅찬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로 강력히 권고합니다. 바로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만인사제설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이를 근거로 루터는 교황과 성직자 계급에 집중되어 있던 모든 교권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강단을 낮추고, 강단에 있는 모든 조형물을 없애고, 평신도들도 강단에 오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참된 사제이고, 신자 사이에는 직무의 차이만 있을 뿐 신분의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개신교회의 유산입니다. 이 정신과 유산이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근대 인권의식과 민주정신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난 500년의 개신교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지 못한 가르침이 이 만인사제설입니다.

1895년,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평양에서 80리나 멀리 떨어진 평안남도 강서군 학동에 살고 있던 전삼덕(全三德) 부인에게 세례식이 베풀어졌습니다. 이화학당의 창립자 메리 스크랜튼 선생님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선교사와 김창식 전도사 그리고 이은성 씨가 여기에 동행했습니다. 학동 마을의 한 양반집에서 태어나 벼슬하는 남편과 결혼해 평탄한 삶을 살던 전삼덕 부인은 40대 후반에 평양에 들어온 '예수교'를 받아들이면서 삶이 전적으로 변했습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탄압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52살이 되던 1895년에 그는 스크랜튼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권유받았습니다. 하지만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모르는 외간 남자, 그것도 서양 남자와 직접 대면할 수 없기에 전삼덕 부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당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내외법이 있어 양반집 규수는 낮에는 바깥출입을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밤에 바깥출입을 할 때에도 '쓰게 치마'를 둘러쓰고 하인을 대동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이 외간 남자와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어서 'ㄱ자 교회'가 생겨나 중간에 휘장을 쳐 두고서 강대상 설교자를 향해 서로 분리되어 앉아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물로 세례받기를 원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외간 남자 앞에 머리를 내밀고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때 스크랜튼 선교사가 제안한 것이 바로 '휘장 구멍 세례'였습니다. "방 한가운데 휘장을 치십시오. 그리고 머리를 반쪽 내어놓을 만큼만 구멍을 내십시오." 그 작은 구멍으로 전삼덕 부인은 머리를 내밀었고 스크랜튼 선교사는 건너편에서 물을 떨어뜨려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례는 서북지방 첫 여성 세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삼덕 부인이 받은 이 휘장 구멍 세례는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의미를 넘어, 오랜 시간 가부장제의 인습과 억압에 고통받던 조선 여성들의 해방을 선언하는 거대한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휘장 구멍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 전삼덕 부인이 뚫었던 것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백 년을 지배해 온 가부장적 인습과 차별이라는 두꺼운 장벽이었습니다. 여필종부(女必從夫),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봉건사회 속에서 여성은 일방적인 희생자였는데, 휘장 구멍 세례를 통해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휘장을 찢으시고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이 전도된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주님의 미니스터(minister), 즉 성직자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새 임원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가 주님의 성직자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제사장들입니다. 예수께서 휘장을 찢으시니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그가 열어젖히신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교독문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에베소서 4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제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사랑의 행동으로 진리를 말하고 세상에 소망을 주는 새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살리기 위해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순명(順命)하고 헌신(獻身)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의 <교회 종소리>를 읽으며 말씀을 마칩니다. 집에서든 예배당에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한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홉 시에 울리는 / 교회 종소리는 / 주일학교 종소리 / 죄 짓지 않은 아이들 / 죄 짓지 말라 / 부르시는 종소리 // 열한 시에 울리는 / 교회 종소리는 / 대예배 종소리 / 죄 많이 지은 어른들 / 어서 와 회개하라 / 부르시는 종소리."

여러분에게 교회를 부탁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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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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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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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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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