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손 씻으세요"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1:8-10, 요한1서 4:16-19, 요한복음 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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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한국교회는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곡의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주일 '공(公) 예배'를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1940-45년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수백 개의 장로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대신 교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사참배를 찬성한 교회들은, 비록 교회의 문은 열 수 있었지만,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순국 장병에 대한 묵념 그리고 사상 통일을 위해 암송해야 하는 황국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를 한 이후에야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출애굽 이야기가 들어있는 구약성서와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서와 찬송가를 사용해서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훼절(毁節)된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태평양전쟁 말기가 되면 일제가 교회당을 전쟁용 산업 공장이나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이런 예배조차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이상 옥성득, "신사참배로 가는 길," <기독교사상> 2019년 11월호).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거짓 예배를 드리느니 차라리 예배당의 문을 닫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겠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전통이고 숭엄한 정신입니다.

만약 교회가 주일 공동예배를 금해야 하는 상황이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목숨을 걸고 예배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처럼, 만약 그것이 사회 전체의 안녕과 복리를 위한 것이라면, 교인 각자의 처소에 흩어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절대로 신앙적으로 부끄럽거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교회라는 존재가 사회 전체의 행복과 건강에 기여하는 곳이라는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4장).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든지, 주일을 성수(聖守)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전염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화간호과학연구소가 기획하고 이덕주, 하희정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한 책, 『이화간호교육의 처음을 연 사람들, 마가렛 에드먼즈와 이정애』(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안에는 구한말 전염병과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46~64쪽). 조선 왕실은 변화에 속도를 내고자 했으나 한발 늦은 개방은 늘 힘에 부쳤습니다. 조선은 점차 주변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어갔고, 전쟁으로 향하는 시계도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가장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리 없이 다가와 백성들의 생명과 일상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전염병이었습니다. 한 해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온갖 전염병으로 조선 땅은 피폐해졌고 수많은 주검으로 가득 찼습니다. '은둔국'(隱遁國)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조용했던 아침의 나라 조선에 외부인들이 드나들면서 새로운 전염병도 따라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백성이 가장 두려워한 전염병은 콜레라였습니다. 조선에선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 불렀습니다. 호랑이가 물어뜯는 고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 그러니까 이화가 창립되던 1886년의 여름에도 콜레라가 발생했습니다. 매일 300~400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환자를 가족으로부터 강제격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나섰습니다. 제중원(濟衆院)의 알렌과 헤론, 그리고 엘러스와 언더우드는 물론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 선생님의 아들인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선교사가 나섰습니다. 선교사들의 부인과 가족까지 모두 참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뒤로하고 이들은 일면식도 없는 환자들을 위해 밤낮없이 간호했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선 헌신적인 장례식까지 치러주어 그들의 마지막 품위까지 지켜주었습니다. 이를 본 조선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가족도 가까이하지 못하는데, 자기 민족도 아닌 타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조선의 민중은 이 땅 위에 다른 차원의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콜레라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인 1887년에도 수천 명이 쓰러졌습니다. 8년 뒤 1895년에 청일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콜레라는 더욱 위협적이었습니다. 일본이 승전하며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자, 그 길을 타고 거꾸로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한양으로 남하했습니다. 조선의 백성으로선 또 한 번의 전쟁을 겪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 방안이 없는 조선 정부는 결국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온 분이었습니다. 조선 정부의 내무대신인 유길준은 애비슨을 급히 집무실로 불러 예방책을 묻고 치료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애비슨 선교사는 즉시 방역대를 조직하고 곳곳에 전담 진료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콜레라는 오염된 물이 근본 원인이기에 예방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물과 음식을 끓여 먹어 세균을 막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전염병마저 귀신의 해코지로 믿고 있었습니다. 콜레라가 세균에 의한 감염이라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마다 주문(呪文)을 써서 대문에 부적으로 붙여두었습니다. 콜레라가 '쥐 귀신' 때문이라며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여두는 집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보다는 소문에 떠도는 민간요법이나 미신적 행위를 더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엔 아예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콜레라와의 전쟁에서 사령탑을 맡은 애비슨 선교사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만들어 사방에 붙였습니다. 배움의 기회에서 소외된 여성들도 읽을 수 있도록 쉬운 한글로 써서 붙였습니다.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 발병됩니다. 균이 몸에 들어오면 급격히 증가해 병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음식을 반드시 끓이고 그 음식이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갓 끓인 숭늉을 마셔야 합니다. 찬물을 마실 때도 끓여서 깨끗한 병에 넣어둬야 합니다. 그리고 식사 전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도 이 포고문의 맨 끝 문장에서 따왔습니다.

콜레라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병"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직업적인 의무감을 넘어 헌신적인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이에 감동한 상류계층의 선비나 양반 중에서 간호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신분이 모든 것을 말해주던 조선 사회에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는 놀라운 용기와 사랑의 정신은 콜레라보다 더 강한 전염력을 띠고 사람들 사이에 번져나갔습니다. 이에 힘입어 결국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엔 한 마을에 역병이 돌면 주민 3분의 2가 죽어 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콜레라는 더 심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1821년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이 병에 걸린 사람 열에 하나둘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콜레라의 치사율은 무려 80~90%에 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나선 1895년엔 콜레라 환자 10명 중 6명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염자의 3분의 2가 살아나는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방역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콜레라의 기세는 단 7주 만에 완전히 꺾였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 환자의 수의(壽衣)를 만들어온 가족은 사랑하는 가족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의약품이나 위생 관념이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던 시절, 두 달도 되기 전에 방역이 결실을 본 것입니다. 의료진의 빠르고 현명한 처방, 간호 지원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그리고 살고자 하는 환자들의 강한 의지가 삼위일체로 작동해 기적을 이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엔 '기독교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와 서양 의술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편견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복음에 조선의 백성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부터입니다.

"손 씻으세요." 단순한 이 한마디가 125년 전에 조선을 구했습니다. 사실 질병 자체보다는 질병에 대한 오해가 더 큰 두려움과 희생을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특히 빠르게 퍼지는 전염병은 환자의 고통도 문제지만 순식간에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집단적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에 사로잡힌 대중은 불행한 선택을 반복합니다. 골든타임이 생명인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는 치료의 기회조차 빼앗아 갑니다. 질병 자체보다도 질병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는 단지 교리만 설파하지 않았습니다. 교세 확장을 위한 전도에 몰입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조선의 백성을 위해 의학상식 보급에 힘썼습니다. 당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는 선교사들의 손에는, 그리고 집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들의 손에는 질병 예방법을 쉽게 설명한, 한글로 된 소책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강의뿐만 아니라 간단한 위생 교육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하나둘씩 지역에 세워지기 시작한 예배당은 복음을 선포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위생 교육장'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질병과 역병을 귀신의 장난인 줄 알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백성에게 자유와 광명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서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무지와 미신의 근원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양에서 전염병 하면 무엇보다 중세 시대에 크게 위세를 떨친 흑사병(黑死病, pest)이 떠오릅니다. 1346년에서 1353년 사이에 유행한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이나 죽음에 이르게 하고, 중세의 봉건제까지 뿌리채 흔든 대참사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돈이 많은 부자들은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고 그 안을 진귀한 미술품들로 장식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시길 갈망했습니다. 그 시절 <채찍질 고행단>도 등장했습니다.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참회하는 행렬이었습니다. 이들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았으며 아무 데서나 잠을 자는 등의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채찍질 상처로 인한 염증 때문에 오히려 이들의 몸은 흑사병의 숙주가 되었고 이들이 방문하는 곳마다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지금도 일부 유럽 도시에서는 이 채찍질 고행단의 풍습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사순절 기간에 흰색 가면을 쓰고 고행단의 흉내를 내는 행진이 벌어지곤 합니다.

스페인의 대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바로 이 <채찍질 고행단>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전염병 앞에서, 이성은 잠들고 악마는 깨어났다," 한국일보 2020.2.20.에서 인용). 1812년에 그린 이 그림은 고야가 인간의 무지와 광신(狂信), 그리고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 위해 그린 여러 작품 중 하나입니다. 세로 43cm, 가로 76cm의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검은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사람들,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 성모 마리아 동상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중앙에는 뾰족한 모자를 쓰거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등에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며 행진하는 반나체의 남자들이 보입니다. 허리춤으로 걸쳐진 그들의 흰옷 위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종교적 광신이 빚어낸 인간의 비이성과 잔인성을 그린 것입니다. 화가는 종교적 신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리석음과 무지를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흑사병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 믿고 교회에 모여 집단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지만 결과는 오히려 참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고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깨어난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하거나 채찍질로 전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 역시 고야의 시대와 똑같은 무지와 비이성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SNS를 통한 가짜 뉴스와 각종 음모론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 나아가 혐오와 인종차별이 그것입니다. 흑사병의 원인이 쥐에 기생한 쥐벼룩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외국인, 유대인, 부랑아,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이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믿고 그들에게 혐오와 폭력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다는 현대에도 전염병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전히 중세와 마찬가지로 초라하기만 합니다.

전염병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정죄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걸린 사람도 자기 예배에 오면 하나님이 다 고쳐주실 거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말들은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과 말들은 고야가 비판한 '중세적 광신'에서 그들이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이 지금 이 땅에 횡횡하고 수많은 이단 사이비 종파의 숙주(宿主)이자 밑거름입니다. 지성과 이성을 외면하는 신앙은 반드시 미신적 신앙에 빠지고 시대착오적인 신자들을 양산합니다.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는 신도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번 사건을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 이런 신천지에 개신교 신자들이 포섭 1호 대상이 되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한국 개신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반지성주의일 것입니다. 지성을 경시하고,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립시키며, 믿음을 몽매주의(蒙昧主義)로 인도하는 풍토일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안셀무스는 "믿음은 스스로 이해를 추구한다"(faith seeking understanding)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이해를 거부하고 무조건 믿으라는 신앙은 광신(狂信)과 경신(輕信)의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는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어떻게 악마가 사람들이 바른 신앙의 길로 가는 것을 멈추고 악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짓과 '미혹의 영'(요한1서 4:6)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모략과 거짓은 악마의 일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미신과 광신과 혐오를 불러옵니다.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것은 공포입니다. 두려움입니다. 거짓입니다. 미혹입니다. 정죄입니다. 혐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공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지배하고 이득을 취하는데 공포를 일깨우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포심리를 잘 활용하는 대표적 집단이 독재자고 사이비 종교집단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를 이용해 사익을 챙기는 공포 마케팅을 합니다. 바이러스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철저히 대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심리적 공포의 확산을 막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조심을 하되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말처럼, "두려움은 미신의 주 근원이며 잔혹성의 여러 근원 중 하나"입니다. "지혜의 첫걸음은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심하되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이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신약 서신의 말씀처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1서 4:1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 6:25-34). 그렇습니다. 공중의 새와 지천의 이름 없는 들풀까지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 우리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지배를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일상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이 커갈수록 일상은 마비되고 우리의 일터는 무너질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 악이 쳐놓은 그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넘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 견딜 힘을 주시려 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91편의 기자도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91:2, 6). 역대하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역대하 20:9).

각자의 처소에 흩어져 함께 예배하시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질병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는 우리 앞에 주님은 다가와 먼저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태 9:2). 우리의 두려움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아시고 돌이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그리고 제자들이 갈릴리바다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죽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둠을 뚫고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4:27). 예수께서는 이렇게 병들고 고통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장독 안에 물을 넣고 쥐를 빠뜨려 보는, 조금은 야만적인 실험입니다. 항아리 입구를 막아 캄캄하게 했더니 3분 후 쥐는 다 죽었습니다. 사인(死因)은 수영을 못해서가 아닙니다. 쥐는 수영선수들입니다. 체력이 떨어져서도 아닙니다. 3분은 물에 떠있기엔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장독에 한 가닥 빛이 비취게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쥐들은 무려 36시간이나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3분 만에 죽은 쥐들의 사인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공포감이었습니다. 한 줄기 빛도 없을 때의 절망감, 결국 이렇게 죽는가 하는 두려움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빛을 보면 안심하게 됩니다. 한줄기라도 빛이 비추면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구원의 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빛을 세상에 비추고 세상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국난을 극복한 경험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번에도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 노출된 이웃을 가슴으로 품고, 질병확산을 막고 이를 극복하는 일에 한마음이 됩시다. 지역에서 격리된 가족이나 이웃을 돌보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며,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사, 간호사, 공무원들에게 깊은 신뢰와 감사, 격려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공포를 극복합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오늘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 14:27).

기도합시다. 주여, 코로나바이러스를 물리치시고 이 어둠이 물러가게 하소서. 환자들을 강건케 하시고 밤낮으로 수고하는 의료진을 보호하소서. 허탄한 믿음을 추종하는 이단들이 회개하고 교회가 개혁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서로를 위로하여 힘을 합해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소서. 바이러스에 고통당하는 다른 나라들도 지켜주시고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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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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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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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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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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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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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