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과 우파 목회자 중에 이승만의 건국 이념이 다음 네 가지였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 네 가지 기틀을 마련한 건국 대통령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과연 그러한지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자.
1. 정치: 자유 민주주의
2. 경제: 시장 경제 (자본주의)
3. 군사: 한미 동맹
4. 종교: 기독교 입국론
해방 후 3년 군정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른 건국 이후 이승만 정권의 초기 성격에 대해서는 책과 논문이 많고 다양한 견해가 있다. 나는 이 시기 전문가가 아니므로 지식이 얕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이 네 가지로 보는 해석에는 많은 약점과 일부 장점이 공존한다고 본다. 정치가나 선동가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두부 자르듯이 그렇게 규정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지층을 시추하려는 '두꺼운 역사'를 지향하는 최근 사학계 추세를 따르지 않더라도, 식민지 체제에서 바로 이런 민주주의/자본주의/기독교 국가로 전환했다고 보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게 보는 것이다.
1. 정치: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 1930-40년대 나찌 독일의 전체주의 (일본의 국가주의 파쇼체제와 유사) = 1당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를 추진할 뜻이 있었으나, 냉전 분단 체제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최전선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 민주주의는 시기상조였다. 이승만 내각에 포진한 국무총리 이범석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나 국회의원 중에는 나찌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친나치 권위주의 정부 체제 옹호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청년 동맹을 조직 훈련하여 정권 기반을 만들었다. 교육부장관 안호상은 독일 민족 인종주의를 변형한 단군 민족주의, 소아를 극복하는 국가적 대아를 함양하는 것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일제의 전체주의 교육이나 이승만의 일민주의 교육,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식 국민 양성은 모두 국가주의의 형태였지,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 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6.25 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노쇠한 대통령 아래 정권을 부패시킨 내각과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점차 일당 독재로 나아갔다.
또한 친일부역 세력을 청산에 실패한 과오가 있다. 북한도 친일 세력을 썼으나, 남한은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면서 대거 살아 남았다.
물론 이승만 강력한 반일 정책을 유지하고 독도도 대한민국 영토로 확보했다. 또한 자신이 젊었을 때처럼 학생들이 4.19의거를 일으키자 자진 사임했다. 자신의 정부가 민주주의로 가르친 학생 시민들이 시위하며 물러날 것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그들에게 민주주의 미래가 있다고 믿고 물러났다.
2. 경제: 왜곡된 자본주의는 일제 시대에 도입되어 시행되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시절 남한 경제에서 중요한 계기는 적산 불하(1945-56), 원조물자의 배분, 농지개혁(1949)이었다. 제헌 헌법을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미군정 3년 간 15% 정도의 적산이 불하되었고 동일 노선에서 진행되다가 6.25 이후에 처리했는데, 소수의 미래 재벌들이 이익을 과점했다. 자유 시장 경제라기보다는 정경유착에 의한 소수 자본가에게 특혜가 돌아갔다. 불하 대상자와 관련 정치인, 담당 관료 등과의 사이에 상당한 결탁이 있었다. 농지개혁 결과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기독교 재단들도 피해를 입었다. 소농들이 토지를 소유하면서, 자본주의 기틀이 잡혔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토지를 수호하기 위해 그 자녀들이 전쟁에 나가 북한의 침략을 저지했다.
이승만 정권의 경제는 정경 유착,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등 박정희 시대의 경제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전후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성장했다.
3. 군사: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치적이다. 남한 안보가 보장되었다. 통일을 위한 바람직한 국제 관계, 남북 관계는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군사적으로 대한민국-미국-일본 대 북한-러시아-중국 구도는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다만 유럽의 나토와 같은 다국간 상호방위체제가 아니라 한미, 일미, 대만미국, 필리핀 미국 등 양자 방위조약으로 소위 샌프란시스코 체제 냉전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동아시아를 영구 분쟁 지역으로 남겼다.
4. 종교: 개신교에 일제 적산 불하, 기독교방송 허가, 군목과 형목 제도 마련 등의 특혜를 준 것은 사실이나, 불교측도 사찰의 막대한 부동산을 받았기 때문에 특혜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 연설에 등장하는 기독교 입국론은 하나의 수사법이지, 실제로 이승만 시대에 기독교 국가가 건설된 것도, 기독교 정책이 우위에 선 것도 아니고, 여러 정책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실현되지도 않았으며, 기독교인도 인구의 5% 이하였다. 현재 중국 인구에서 약 7%가 기독교인인데 중국을 기독교국가로 보는 사람은 없으며, 대한민국 20-25% 인구가 개신교인이라고 자부하던 1984-90년대에도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유교의 충효사상을 적절히 이용했으며, 대종교의 단군 신앙을 국가 이념에 이용했다. 무엇보다 강력한 반공 사상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것이 당시에는 기독교와 등치되었으나, 지금은 기독교 = 반공 공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반공 국가라고 해서 기독교 국가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4.19 세대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면서 정치 지도자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정권이 무너졌다고 보았다. 그것도 반성적 차원에서 한 말이지 정치적, 기독교사적 평가는 아니다. 지금도 국회의원의 과반이 기독교인이라도 기독교 국회나 정권으로 보는 사람이 없듯이, 당시에도 기독교 국회나 기독교 내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감리회 장로 이승만, 장로회 장로 김영삼과 이명박, 침례회 전도사 황교안이 기독교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거나 잡으려고 하지, 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시행한 것은 아니다. 표가 되면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가는 게 정치가다.
전광훈은 목사라기보다는 우파 기독교인을 이용하는 정치가이다. 2007년 "이명박 장로님을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전광훈 2007년 4월)고 하더니, 이제는 문재인 민주당 찍으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한다. 그가 뭔데 예수님이 쓴 것을 지울 수 있겠나? 그가 가진 생명책은 짝퉁이다.
※ 이 글은 옥성득 교수(UCLA 한국기독교 부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을 주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