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III. 두 가지 종류의 방언?
3.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주기도문의 첫 문장에 나오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예수님을 믿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入養, adoption)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眷屬, 가족, 자녀, 엡 2:19)이 되었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갈 4:6)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과 동시에 인격적(人格的)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omniscient) 전능하셔서(omnipotent) 그 자녀들이 지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의 어느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다 들으시고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교제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들로 하나님은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과 소통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인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아무리 전지하시고 전능하셔도 그 소리의 뜻과 의미를 아실 수 없습니다. 중얼거리는 UT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도 그 기도를 알아 듣지 못하십니다. 또한 그 UT방언으로 응답하실 수도 없습니다. UT방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소통의 도구나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내뱉는 중얼거리는 소리(voice)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리는 말(speech, wording)이 아닙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과 은밀하게 비밀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인용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알아 듣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셔서 우리의 마음 속까지도 다 아시는데, 하나님께 은밀하게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실 수 있는 비밀이 우리 인간에게 있을 수 있을까요? 마귀가 알아 듣지 못하도록 방언으로 기도한다는데, 그럼 왜 사도 바울은 방언을 통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통역을 하면 마귀에게 비밀이 폭로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마귀가 알아 듣지 못하는 UT방언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알아 듣지 못하십니다. 거기에는 내용과 메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은 인격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인간의 언어들(human languages)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10살 정도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부모가 그 아들을 영어학원에 보내서 영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몇 개월 후에 그 아들이 학원에서 배운 영어로 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면 아버지도 영어로 답변을 하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갑자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쏼라쏼라 룰루룰라 쌍따쌍딸" 하면서 아버지에게 이상한 소리로 말을 건넨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해진 아버지에게 아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비슷한 소리를 낸다면, "예이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호통을 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과 인격적인 교제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는데, 아들은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아버지에게 이상한 소리를 낸다면, 아버지로서는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UT방언은 어차피 인격적인 대화나 소통이 불가능한 소리(uncommunicable voice)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한 소리를 통해서는 인격적인 의사소통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UT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연유한 발성현상일뿐입니다. 인간이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많이 하면 혀에 마비현상(痲痹現狀)이 생기기도 하고 성대(聲帶)에 이상(異狀)이 생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착란(錯亂)의 상태에서 인간의 자율신경계에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환각상태에서 내는 중얼거림(ecstatic utterance)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habitually) 발설하는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로서의 기도는 기도자의 솔직한 마음을 정상적인 언어로 제 정신으로 토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쏼라쌀라, 우다다다, 마리꾸나" 하면서 지껄여대는 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교수로서 세미나 과목을 학생들에게 지도할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학생이 자신이 연구해 온 내용을 발표하는데, 자신도 자기가 하는 말을 모르면서 발표를 할 때입니다. 특히 외국문헌을 인용함에 있어서 자신도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표를 하는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발표를 합니다. 이러할 때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는 무척 난감해집니다. 반대로 교수 역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소리로 학생들에게 강의한다면 학생들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말은 의사소통의 매개체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이 뜻과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unintelligible voice)라면 인간과 인간 간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면 그러한 소리로는 하나님과의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사람들이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아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필자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UT방언으로 중얼중얼하는 기도를 하셨다는 기록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重言復言, me battalogesete 'wsper oi 'ethnikoi, 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KJV,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NIV)고 교훈하셨습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기도를 하는데 방언기도가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자녀들이 기도로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에 말을 반복해서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인격적인 우상신들은 전지하지 않으니까 이방종교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 자신의 신(神, a god)이 듣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마 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르게 될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glossais lalesousin kainai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KJV,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NIV)이라고 유언하셨습니다(막 16:17-18). 여기서도 예수님은 LT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그 예언적인 유언이 사도행전 2장과 10장과 19장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UT방언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UT방언 기도가 뜻과 내용이 없는 소리일뿐 아니라 대체로 몇 마디 음절의 소리를 반복해서 발설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정작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기도입니까? 그리고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방언은 "말하는 것"(메시지가 있는 의사소통, speaking)이지 "기도하는 것"(praying)이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들에게"(for God, to men) 하는 뜻과 메시지가 있는 말이지, "하나님께"(to God) 기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UT방언 기도를 누가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교도들의 기도행습이었고,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 행하던 이교적 신앙의 옛 악습(old bad custom)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UT방언 기도를 하는 자들을 비꼬면서 비판하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이외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방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방언주창자들의 주장처럼 UT방언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필요불가결하게 중요한 요소라면, 왜 그들이 고린도전서 14장 이외에서는 방언과 방언통역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나 권장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편집자 주] 이 글은 김승진 명예교수(침신대/철학박사)가 보내온 연재글 '성경이 말하는 방언'입니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성도들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현실 속에서 성서를 근거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방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29차례에 걸쳐 연재글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