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루터기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6:8-13, 로마서 13:8-10, 마태복음 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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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이번 코로나 사태는 종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천주교는 236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전면 중단했습니다. 불교는 법회를 중단하고 산문(山門)을 잠갔습니다. 많은 개신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지만, '한국전쟁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주일예배를 놓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몇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교회를 둘러싼 여론은 싸늘해졌습니다.

전북 익산의 한 대형교회 목사는 대통령이 다윗왕처럼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서, 그리고 국민이 이 나라를 잘 살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 코로나가 왔다고 말하며, 모여서 예배를 안 드리면 축복이 저주로 바뀌고 영적으로 망한다고 설교했습니다. 한 유명한 금식기도원의 목사는 주일날에는 반드시 교회에 모여서 예배해야 한다면서, 예배하면 "천국에서 신선한 공기가 내려"오니 마스크를 벗으라고 했습니다. 코로나 19가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주일예배 문제는 개신교회에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마태복음 4:5-7)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 위에 세워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활한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시편 91편 12절,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 유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시면서 "주의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이를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신명기 6장 16절의 배경은 출애굽기 17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Shin) 광야를 떠나 르비딤(Rephidim) 평원에 장막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심히 다투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3절) 조금 있으면 모세를 돌로 칠 기세였습니다. 모세의 긴급한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치게 하시니 거기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곳의 이름을 '맛사'(Massa) 또는 '므리바'(Meribah)라 불렀습니다.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이고 므리바는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달라 모세와 다투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7절)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면 하나님이 계신 거였고 안 채워주면 계시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 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하라"고 외쳤습니다. 1527년의 논문,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당시 독일에 흑사병이 창궐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약의 사용을 멸시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강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인 양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먹으라. 집과 거리를 소독하라. 사람과 만남을 피하라...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신약성서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 하지만 이 말씀이 기록되었을 때의 초대교회는 오늘날처럼 수천수만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주로 가정에서, 소수의 인원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구절 바로 앞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브리서 10:24). 즉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일도 열심히 모이는 일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熱心)이 가득해도 이웃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자를 긍휼히 여기시어 때론 일부러 안식일을 범하기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마가 2:27).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은 성경의 말씀(호세아 6:6)을 인용하시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12:7)라고 반론을 펼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제사(예배)가 아니라 자비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나님은 거짓된 제사가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신다고 외쳤습니다(이사야 1:11-17).

지금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현장으로 달려가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스크나 소독제를 만들어 이웃에게 선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사겠다고 몇 시간씩 줄을 서는데, 마스크 사지 않고 양보하는 운동을 벌이는 분들도 있습니다(한국 YWCA의 "After You" 운동 등). 자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조사해 긴급 물품 구매로 돕고, 휴원을 결정한 학원 등에 월세를 지원하고, 미혼모 가정에도 긴급으로 물품을 지원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서울 관악구 더드림 교회 등). 이 모두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일 것입니다. 이렇게 못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혹시라도 이웃에게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이 시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일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사무엘상 15:22). 자비가 제사보다 낫습니다.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9-10).

<코로나 시대의 8복>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호주의 톰 슈먼(Thom M. Shuman) 목사가 지은 글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다시 오신다면 아마 이런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선포하실 것 같습니다. "자신의 손을 청결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생명수를 담을 것임이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임이요, 자율격리를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이웃을 도울 것임이요, 사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모든 식구를 먹일 것임이요, 격리된 이웃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늘의 천사들이 될 것임이요, 가정에서 학습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부모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자녀로부터 배울 것임이요, 나이든 이들을 위해 생필품을 구매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영원한 감사를 받을 것임이요, 일선에서 헌신하는 의료진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인류의 치유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Blessed are they who wash their hands, for they shall hold living water; Blessed are those who keep their distance, for they shall draw closer to God; Blessed are they who self-quarantine, for they shall help others; Blessed are those who do not hoard, for they shall feed families; Blessed are those who sing songs to sheltering neighbors, for they shall be members of the heavenly host; Blessed are parents who learn how to teach at home, for they shall learn from their children; Blessed are they who shop for older folks, for they shall receive everlasting thanks; Blessed are the front-line health wor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healers of humanity.)

오래전 유학 시절에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스키 여행을 갈 때 처음으로 스키를 타 본 적이 있습니다. 드넓은 설원(雪原)에 나가니 어서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스키를 가르쳐주신 목사님은 오전 내내 멈추는 연습만, 그리고 넘어지는 연습만 시키셨습니다. 두 시간 넘게 서고 넘어지는 연습만 했습니다. 운동에는 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던 저는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비로소 코스에 올라가 보니 멈추고 넘어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니 스키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재빨리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멈출 줄 모르면, 그리고 안전하게 넘어질 줄 모르면 곧 낭떠러지기로 곤두박질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멈출 줄 몰랐습니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일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넘어지면 절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시 멈추어 사람들과 예방적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의 삶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삶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조용히 홀로 있으니 무엇보다도 나와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 어려웠는데 외로우니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심을 느낍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언제 그렇게 한가롭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할 시간이 있겠는가 의아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외로움을 싫어합니다.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를 만들고 평생의 동반자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회로부터, 관계로부터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남모르게 노력합니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따라서 좋은 관계 속에서만 참다운 개인의 존재의미가 규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관계에 집착하다 보니 홀로 잘 있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모릅니다. 홀로 주님과 함께 있는 법을 잊어버렸는 지 모릅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주님과 동행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 관계에 집착하다 보니 자아와 관계 사이에 있어야 할 창조적 긴장 관계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은 무엇이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 관계 속에 휩쓸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잠시 멈춘 이 특별한 시간에 우리에겐 영혼의 깊은 호흡이 필요합니다. 영혼의 심호흡이 필요합니다. 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무리와 함께 계시다가 시간만 나면 홀로 멀리 나가 기도하셨습니다(마가 1:35, 6:32, 6:46, 마태 14:23, 누가 5:15-16, 6:12-13, 9:18).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잠시 멈춤'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 시간을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히 만나 교제하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시간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각자의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입니다.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 혼자이기를, // 말하고 싶은 말이 많은 때일수록 / 말을 삼가기를, // 울고 싶은 생각이 깊을수록 / 울음을 안으로 곱게 삭이기를, // 꿈꾸고 꿈꾸노니 - // 많은 사람들로부터 빠져나와 / 키 큰 미루나무 옆에 서 보고 / 혼자 고개 숙여 산길을 걷게 하소서."

흩어져서 예배하는 우리는 지금 '기다림'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는데(로마서 5:3-4) 우리는 그 소망을 기다리는 시간 안에 있습니다. 언젠가 검역, 혹은 격리를 뜻하는 영어의 '쿼런틴'(quarantine)이 '40일'을 뜻하는 이탈리아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할 때 항구에 들어온 배는 접안(接岸)하기 전에 40일을 기다리며 환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40일'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방주 속에서 40일을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야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부활의 새 아침을 맞기 위해 40일간의 사순절(四旬節)을 보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기간 안에 있습니다. 이렇듯 '40'이란 숫자는 특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기보다 무언가 놀라운 새 시작과 희망을 맞이하기 위한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마른 땅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복음선포의 공생애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희망의 기다림 안에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이사야 6장)의 말씀은 폐허와 절망 속에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소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하지만 이사야가 위탁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9-10절).

이사야 예언자는 어려운 일을 맡았습니다. 소명 받았을 때 그는 먼저 규탄하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했습니다. 못된 짓을 일삼는 귀족들, 돈에 눈이 먼 재판관들, 물질적 향락에만 관심을 쏟는 상류계급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했으며, 그들이 벌이는 사치스러운 제의(祭儀)도 더럽고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병들대로 병들어 있는 백성들도 심문(審問)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단순히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1절). 이사야의 질문에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11-13절). 이스라엘의 죄로 성읍과 땅이 모두 폐허가 될 때까지, 그중 10분의 1이 남아 있어도 그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걸까요? 그런데 놀라운 반전(反轉)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13절). "이렇게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공동번역)라는 말씀입니다.

그루터기(stump)는 나무가 잘려나가고 땅에 박힌 뿌리만 남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holy seed),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remnant)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숭배에 빠져 있을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7천 명이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열왕기상 19장).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남은 자들을 통해, 거룩한 씨를 통해 이스라엘을 새로 지으시겠다는 겁니다. 모든 나무가 찍혀도 남은 그루터기 위에 이스라엘을 다시 지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독문(42편)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는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환난 가운데 교회를 향한 세상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며 사람들이 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힐난(詰難)하는 것 같아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비록 우리는 지금 흩어져 있지만 이렇게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다시 모이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과 더 가까이 지내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생텍쥐베리, <어린왕자>)입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모든 나무가 베임을 당해 세상이 황폐(荒廢)해질지라도 할지라도 우리는 그루터기로 남아 거룩한 씨로 새 생명의 봄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엄동설한(嚴冬雪寒) 겨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제 곧 봄이 오고 하나님의 거룩한 씨에서 새싹이 틀 것입니다. 이재호의 시 <3월에 내리는 눈>입니다.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보았는가 / 아직은 겨울이 묻어 있는 것 같은 안개를 헤치고 / 하이얀 까치 소리처럼 내가 먼저 누군가의 가슴에 다가가 보았는가 / 아아, 이제는 봄이라고 살아야겠다고 / 잠든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보았는가 / 상큼한 치약 내음이 묻어날 것 같은 그리움으로 / 그 누구보다도 일찍 아침을 열어 보았는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 자꾸자꾸 편지를 띄워 보았는가."

재난(災難)은 영어로 '디재스터'(disaster)라고 합니다. 그 어원을 살펴보니 '별'(astro) '없는'(dis) 상태라는 뜻입니다. 과거 지중해와 에게해를 항해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망망대해에서 별을 보고 항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별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배가 방향을 잃는다는 뜻이고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난("dis-astro")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별입니다. 희망의 별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소망의 근원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432장)처럼 지금 우리는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를 지나고 있습니다. "큰 풍랑이 [우리가 탄]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은] 입 벌려 달려"듭니다. 하지만 "이 바다에 노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의] 사공은 주님"입니다. 그분이 "큰 소리로 물결을 명하시면 이 바다는 고요히 잠자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동녘이 환하게 밝아올 때 [우리] 주[와] 함께 이 바다 건너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믿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이란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을 걸으며, 비록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하십시오. 홀로 있어 외로울 때 하나님과 더 가까이 계십시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비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다 들었으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그루터기로, 남은 자로, 거룩한 씨앗으로 이 환난을 인내하며 새 생명의 부활을 준비하는 복된 기다림의 시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20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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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