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시진핑이 중국 교회를 더욱 핍박했다. 집단으로, 전체로 모이지 못할 만큼 압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회가 더 작은 단위로밖에 모일 수 없는 상황에서 의외의 결과가 생겼다. 더 작은 단위로 모이다보니, 그 작은 모임들을 인도할 지도자들이 더 많이 생긴 것이다. 그들을 가르쳐야 할 일도 더 많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은 시진핑이 목회자들을 더 많이 양산한 셈이 되었다.
아직도 중국의 교회는 어렵고 고통 속을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찬송의 한 대목처럼, 구름 낀 하늘 그 너머에는 항상 햇살이 밝게 비치고 있다. 눈물 나는 소망의 노래이다. 신앙이 아니면, 붙잡기 어려운 뜨거운 시선(視線)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신다고 믿는다면, 이 재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원하고 섭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묻고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교회가 더욱 교회다워지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이 고난을 헛되이 하지 않는 지혜로운 길일 것이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교회는 더욱 명확히 의식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교회와 하나님 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부릅뜬 열방, 세상, 교회를 둘러싼 수많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의식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서 있지만, 동시에 세상 앞에 서 있다. 배워야 한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될 수 있는지.
교회 자체의 비대한 몸집, 경직된 조직과 체제도 조금 더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개혁의 가치 그대로, 전 성도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제사장으로 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목회자가 힘써주어야 한다.
베네치아의 수로가 관광객이 사라진 덕에 많이 맑아졌다고 한다. 공장 연기로 오염된 중국 도시들의 대기가 유례없이 깨끗해졌다 한다. 인도의 어느 해변에는 사라졌던 거북들이 수만 마리의 새끼들을 낳았다고 한다. 자연은 덕분에 쉬고 또 회복 중이다.
학생들은 공부한다는 것이, 단지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 대화하고, 교수를 만나 묻고 대답하고 교제함으로써 배워나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만남인가.
성도의 목소리를 전화 너머에서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목회자들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애틋하게 믿음의 형제요 자매가 된, 한 식구 된 사람들인지, 살아 있는 코이노니아가 곧 교회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도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다시 묻고, 다시 대답하고, 다시 세워가야 한다. 그렇게 할, 더 없이 적절한 기회다.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