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엠마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0:9-11, 로마서 5:6-11, 누가복음 24: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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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린도전서 15:14)이라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실 우리에겐 매 주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기념하였지만 우리는 '안식 후 첫날,' 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오늘 이날을 '주의 날,' 곧 '주일'(主日)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본래 '동방절(東方節)'이라는 뜻입니다. 동편은 태양이 솟는 일출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마태 28:1)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은 마치 동녘 하늘에 솟아오른 환한 태양 빛처럼 절망의 두려움에 파묻혀 있던 제자들에게 새 희망과 용기를 비춰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그리스도교의 첫 주일날, 해 뜨는 동쪽이 아니라 해가 지는 서쪽의 황혼(黃昏)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복음서 가운데 오직 누가복음(24장)에만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부활절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길고, 문학적으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입니다. 불후(不朽)의 단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해질녘, 글로바(Cleopas)와 다른 한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글로바, 즉 '클레오파트로스'(남성형, 여성형은 '클레오파트라')는 요셉의 형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육십 스타디온," 즉 약 10킬로미터이며 보통걸음으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이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탈출하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누가 24:21)로 기대했던 스승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제자들은 박해를 피해 숨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실 그날 아침에 큰일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미리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으나 무덤 돌문이 굴려진 것을 보고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예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놀란 여인들이 돌아와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이를 알렸으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누가 24:11)하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만이 무덤에 달려가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고 그 역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하고 걷고 있었습니다(누가 24:14-15a).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누가 24:15-16)고 전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3년이나 가까이 지내던 주님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니요.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여기뿐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공통주제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으나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무덤 밖에 서서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뒤에 서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고 물으셨지만, 마리아는 주님을 몰라보고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시신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알려 달라 말합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니 그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같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요한 21:4).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져 고기를 잡게 하시고 그렇게 잡은 물고기와 떡으로 친히 밥상을 차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처음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 그분이 떡을 떼자 비로소 주님인 줄 알았다고 보도합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이렇게 공통으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일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던지, 두 복음서보다 후대에 기록된 마가복음의 이른바 '더 긴 결말'(마가 16:9-20) 부분은 엠마오 사건을 언급하면서 제자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마가 16:12)라니 해설할 정도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누가의 본문 안에 그 단서(端緖)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누가 24:17). 일출(日出)이 아니라 황혼을 향해 서둘러 걷던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동행하게 된 이가 둘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물으니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습니다"(새번역).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크게 상심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은 비탄과 상실로 가득 찬 길이었을 겁니다. 어둠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슬픔과 고통은 우리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슬픔은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같이 길을 걷게 된 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자 글로바는 "요즘 [예루살렘에]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누가 24:18-21)라고 대답합니다. 이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기대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속량'(누가 1:68, 2:38)은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은 이 일에 있어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이 모든 기대와 희망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누가 24:25)라고 말씀을 꺼내십니다. 제자들은 어리석고 마음이 무딘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시며, 그것이 "모든 성경에 쓴 바 [그리스도] 관한... 설명"(누가 24:26-27)이라 하셨습니다. 실로 지난 주일 말씀대로,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종,' 곧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6)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는"(이사야 53:10-11) 고난의 종이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성서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성서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구원과 다윗 시대의 번영(cf. 누가 1:32-33, 68-71)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이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히브리서 2:9)이라고 증언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슬픔과 어두움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함께 걸으시던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누가 24:19)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믿었던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큰 희망을 품었으나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누가 24:24)라고 대답합니다.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 이후 모든 제자가 가졌던 두려움과 절망의 근원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늘 곁에 계시던 분,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신 분,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힘들고 지칠 때마다 새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 그분을 그들은 더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더는 곁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이후 '주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눈에 보인다면 다시 희망을 품을 수도 있을 텐데, 제자들은 '주님의 부재'로 인한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지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시편 42:1, 3)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사실 우리 자신의 고백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된 이 기이한 이야기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現存)에 대한, 그분의 강한 임재에 관한 제자들의 체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셨으나 다시 사셨다는 가슴 속에 넘치는 확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예수께서 다시 사셔서 함께하셨다는 힘찬 고백입니다. 엠마오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주님은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누가 24:28-29). '함께 유하다'라는 구절을 누가는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고 다시 함께함을 강조합니다. '안식 후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고 저녁식탁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거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 24:30-31).

"눈이 가리어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던"(24:16)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눌 때"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음식을 나눌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는 문구가 특별합니다. 이 안에는 모두 네 개의 동사('가지다' '축사하다' '떼다' 그리고 '주다')가 사용됐는데, 이 동사들은 다름 아니라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와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 누가 9:16, 마태 14:19, 마가 6:41), 또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실 때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누가 22:19, 마태 26:26, 고린도전서 11:23-24) 행하신 것과 완전히 동일한 동사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처럼 똑같이 떡을 '가지사' '축사(감사기도)하시고' '떼어서' '주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며"(누가 5:30)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푸신 이 공동의 식사가, 이 은총의 식탁이 제자들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또렷한 기억이고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 그분이 평소처럼 그렇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시매,"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습니다. 빵을 떼는 것은 매우 단순한 행위지만 그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습니다. 빵을 떼시면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언제나 한결같으신 주님,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같이하시며 도우시는,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순간 두 제자의 깊은 슬픔과 절망의 원인이었던 '주님의 부재(不在)'의 문제는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주님의 가시적 현존의 부재'라는 문제는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속의 어두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본문은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였다"(24:31b)라고 전합니다. '보이지 않았다'(aphantos)라는 그리스어는 '사라졌다'라는 의미인데,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신(神)들의 사라짐'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눈이 열린 두 제자 앞에 더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유명한 카라바조(Caravaggio)와 렘브란트(Rembrandt) 모두 여러 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그렸습니다. 근대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탄생시킨 카라바조는 극명한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극적인 현장감을 드러냅니다. 그의 1601년 <엠마오의 저녁식사 Supper at Emmaus> 작품을 보면 주님과 두 제자 앞에 풍성한 저녁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식탁 위에 부활을 상징하는 석류와, 원죄를 상징하는 사과와 무화과, 성찬식을 상징하는 포도, 그리고 오리구이까지 보입니다. 반면 렘브란트가 1648년에 그린 엠마오의 저녁식탁은 텅 비어 있습니다. 빈 식탁 위로 이제 막 시종(侍從)이 식사를 날라주는데, 하얀 식탁보와 그 위에서 빵을 떼는 예수님의 손이 전체 그림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납니다. '빛의 화가'답게 렘브란트는 어둠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빛 처리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환하게 빛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지 밤의 어두움뿐만 아니라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의 존재입니다. 떡을 떼시는 순간 주님의 현존을 알아본 두 제자는 내면의 어둠이 물러가는 경험을 합니다. 황혼으로 향하던 두 제자의 어두운 마음에 부활새벽의 찬란한 빛이 비췹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절망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을 주님을 일일이 찾아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어두움을 몰아내 주시고 새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누가 24:32)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처럼 성서를 열 때 "마음이 속에서 뜨거[짐]"(hearts burning within us)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하사 승천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떡을 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마처럼 주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도"(요한 20:2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 20:29)라고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 하셨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매일의 삶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빈 무덤 안에 있던 천사는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올라온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 24:5)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분은 과거의 영웅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현존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분입니다. 죽음을 초월해, 시공을 초월해 나사렛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여행자입니다. 황혼의 어둠을 향하는 우리의 엠마오 길에서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책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그 책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는 임재입니다. 지금 나를 감싸는 현존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결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살아계신 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로 가득 찬 세계 안에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유령이나 환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현실입니다. 실재입니다. 임재입니다. 현현(顯現)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인간의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다시 사신 분,' 바로 그분에 기초해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어두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 마음을 빛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빛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8-39).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온 세상에 울려 퍼진 기쁨의 소식은 주님이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실로 부활하신 주님은 마태복음의 맨 끝 그 절정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 28:18-20). '함께 하심,' 그것이 제자들이 체험하고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의 소식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심,' 그것이 교회라는 이 생명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근거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확신이고 체험이며 증언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최소의 독일 시인 중 하나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의 극치에서 고백될 수 있는 시입니다. "내 눈을 감겨보십시오 /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아보십시오 / 그래도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발이 없을지라도 / 나는 당신 곁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 입이 없어도 / 나는 당신에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 내 팔을 꺾어보십시오 /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안을 수 있습니다. / 내 심장을 멈추어보십시오 / 나의 뇌가 맥박 칠 것입니다..." (릴케, <내 눈을 감겨보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생명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의 창문을 활짝 여십시오. 코로나로 꽁꽁 닫은 여러분의 마음의 창을 활짝 여십시오. 겨우 내내 닫아두었던 영혼의 창문을 열어 부활하신 주님의 싱그러운 봄 생명이 가득 불어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이웃에게 사랑의 식탁을 베푸십시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에게 사랑을 나누십시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자리에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나눠주시며 그분의 현존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성서를 여십시오. 주님이 친히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서 주님을 느끼고 만나십시오. 참으로 마음 문을 열고 보면,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내 모든 삶에서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누가 24:48)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의 증인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 즉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발길을 돌렸듯이, 우리도 어두움으로 향하던 우리의 발길을 돌려 동이 트는 예루살렘으로 향할 것입니다. 거기서 땅 끝까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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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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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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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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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