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수기 22:21-33, 고린도후서 5:15-17, 사도행전 1:8-11 -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이 종(種)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神)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렇게 신적인 존재, 즉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된 줄 알았던 인류가 지금 초미세 바이러스 앞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허블 망원경으로나 관측할 수 있는 외계 생명체나 혹은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AI 로봇에 의해서가 아니라, 슈퍼 렌즈로만 볼 수 있는 100nm 크기의, 그것도 생물 축에도 들지 못하는 반(半)생물에 불과한 초미세 바이러스에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집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를,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를 아프리카 차드의 문인(文人) 무스타파 달렙(Moustapha Dahleb)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라 불리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서방의 강대국들이... 기업들이... 시위대가 못 얻어낸 [것들을 그것은]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 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우린 모두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늘의 힘에 맞먹으려 했던 인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 우리는 누구인가? ... 이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하늘의 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기다리면서 스스로 직시하자." 하늘의 섭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고통스러운 시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자연과 동물에 대한 인류의 무지와 학대에서 비롯됐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숲을 파괴하면서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이 접촉하고 질병이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실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야생동물들이 사냥되고 육류 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전 세계에서 공장식 밀집 농장에서 사육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동물에서부터 종(種)을 뛰어넘어 인간에게까지 오는 기회를 줍니다.
그런데 인간의 동물에 대한 무지와 학대의 큰 책임이 기독교에 있음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 학대의 뿌리에는 서구의 이성(理性) 중심적 사고와 이분법적 세계관이 깔려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두 개의 전통에 연결돼 있는데 하나는 유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그리스 전통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성서(기독교의 구약성서)는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지배권(dominion)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창세기 1:28).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 역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 사고 능력 때문에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통합한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동물 학대의 문제는 곧 기독교의 문제가 됩니다. '학대'(虐待, cruelty)란 '지각이 있는 생명체에 의도적으로 가하는 고통'입니다. 모든 학대는 죄입니다. 동시에 신성모독(神性冒瀆)입니다. 온 생명을 사랑으로 지으시고 복을 내리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창세기 1:28)라는 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동물에게도 같은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기 바로 전날, 즉 창조의 다섯 번째 날에 물속의 생물들과 공중 나는 새들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창세기 1:20-23)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물을 먹을거리로 창조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라고 복을 주신 바로 다음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라고 하신 명령, 즉 성서학자들이 하나님의 첫 번째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것을 그 근거로 듭니다. 이를 토대로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물을 맘대로 죽이고 맘대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처럼 해석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세기 1:29).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 직후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은 다름 아닌 '채식명령'이었습니다. 인간에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어서 동물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리십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세기 1:30).
성서에서 인간에게 육식이 처음으로 허용된 건 노아의 홍수 직후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3).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 육식허용이 '조건부'이고 또한 '임시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육식의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세기 9:4). 유대인들은 핏속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피째' 먹지 말라는 말은 생명인 동물을 학대하여 고기를 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밥상에 날마다 올라오는 고기가 '피째' 먹는 고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생명이 아니라 '고기'로 태어나 '공장식 축산'(factory farming) 시스템의 무참한 폭력과 학대를 거쳐 우리의 밥상 위로 오른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육식허용은 또한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창조하신다는 게 성서의 저변을 흐르는 신앙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그런데 이 유명한 이사야의 비전에는 놀라운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맨 마지막 구절,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이사야 65:25)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 했습니다. 소가 사자처럼 고기를 먹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태초의 채식명령(창세기 1:30)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육식이 중지되고 다시 본래의 채식으로 돌아가는 세계입니다.
성서는 동물이 인간과 동등하며 때론 인간보다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동물이 가진 영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전도서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동물]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동물]보다 뛰어남이 없으며...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도서 3:18-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을 가진 존재인 동물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영안(靈眼, spiritual eyes)을 가진 존재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모압의 왕 발락(Balak)이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여 발람(Balaam)에게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수기 22:6)라고 청합니다. 두 번이나 이어진 요청에 못 이겨 발람이 발락을 만나러 길을 떠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민수기 22:23) 길을 막아섰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그를 보지 못하고 오직 그의 나귀가 이를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갑니다. 영문을 모르는 발람은 자기 나귀를 수없이 채찍질하고 지팡이로 때립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나귀가 주인에게 말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수기 22:28) 그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자 그는 비로소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 들고 자기 앞길을 막아서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을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민수기 22:32b-33).
인간 발람은 칼을 뽑아 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보지 못했으나 나귀만이 그 사자를 알아보고 멈추었습니다. 여기서 동물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런 동물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욥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웃는 친구들을 향해 "이제 모든 [동물]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기 12:7-9). 성서에서 동물은 인간의 바른 삶을 위한 규범을 제공하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개미, 바위너구리, 메뚜기, 도마뱀과 같은 보잘것없는 곤충이나 동물을 통해서도 지혜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언 6:6). 이솝은 여기서 영감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런 동물이 지금 인간의 무지와 학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의 자유를 바라보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의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 8:18-22).
바울은 지금 창조세계 전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과 함께 탄식하며 산고(産苦)의 진통을 겪으며 장차 올 영광을 기다리는 모든 피조물을 봅니다. 유대 사상은 시간을 둘로 구분합니다. 현세대는 악하고 무지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곧 '주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로 이 세계가 그 기초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새 세계가 도래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겁니다. 이와 같은 꿈과 신앙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안에 온 피조물을 포함합니다. 아담의 죄로 아무 잘못이 없는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창세기 3:17). 그러므로 죄의 지배가 끝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날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에게 해당해야 합니다. 실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구원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그 영광의 자유에 다른 모든 피조물이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읽은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든지' 안에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등 모든 인간을 포함하지만 바울에게 '누구든지'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산천초목과 우주만물이 다 포함됩니다. 그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kaine ktisis)이 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옛 피조물'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옛 피조물이란 아담의 범죄 이후 그로 인해 저주받은 피조세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정하신 날, 즉 '주의 날'에 잘못된 이 모든 역사를 지우시고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종말론적 희망이었습니다. 그날, 종말의 심판 날에는 커다란 불 심판이 일어날 수도 있고, 물 심판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가뭄과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유대교의 종말사상을 현재화합니다. 역사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종말심판이 우주적인 파국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지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 모든 존재를 새롭게 하십니다.
현대 '지성인의 사도'라 불린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우리 시대를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두 단어로 요약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바울의 말을 빌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메시지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해 했던 말들을 읽어왔습니다. 그의 문장 중 하나를 정확한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와 결합해 있다면 그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낡은 상태는 사라졌고 새로운 상태가 존재합니다'"(틸리히의 설교집, 『새로운 존재』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을 틸리히는 '그리스도와 결합해 있다면'으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는 것과 같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한 15:5)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새로운 존재'(New Being)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로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새로운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이 생명의 주님과 결합해 있습니까? 이 '새로운 존재' 안에 접붙임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려움과 의심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지으시어 땅 끝까지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라고 하셨습니다. 성서를 보니, 주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 가셨고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고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계십니까?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昇天) 이후 재림(再臨) 때까지가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과거 사도들의 행적만을 기리는 회고의 기간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향하라는 말입니다.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 살면서 이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고통스러운 시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이 고통의 시간이 끝난 뒤, 우리는 달라질까요?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가 극에 달한 지금의 상황이 달라질까요? 야생동물들이 서식지를 잃고 인간의 생활공간으로 넘어 들어오고 인간을 숙주(宿主)로 삼아 진화를 거듭하는 바이러스들이 인류의 존재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 세상은 과연 달라질까요? 인간은 '호모 데우스,' 즉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게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종래의 제도와 관행 그리고 생활방식과 신앙습관으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이 왜 이렇게 꼭 처참한 비극을 겪은 다음에야 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 통절한 깨달음에 담긴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이, 특히 인간의 무지와 학대로 수난당하는 동물이 지금의 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러야 합니다.
아일랜드 카푸친(Capuchin)에 있는 작은형제회 수도사 리처드 헨드릭의 <격리 속 희망의 노래>(원제 "Lockdown")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고통당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노래합니다. "그래요,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요, 고립이 있어요. 그래요, 사재기도 해요. 그래요, 병도 있지요. 그래요, 죽음도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한에서 그 오랜 세월 공장 소리가 멈추고 이제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해요. 몇 주간의 침묵을 지나 하늘이 더 이상 매연으로 자욱하지 않고 짙푸르고 맑다고. 사람들은 말해요. 아시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전 세계 사람들이 속도를 줄이고 성찰하고 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어요. 새로운 현실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하며 기억합니다. 그래요, 두려움이 있지만 증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래요, 고립이 있지만 외로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래요, 사재기도 있지만 야비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래요, 질병이 있지만 그것이 영혼의 병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래요, 죽음도 있지만 언제나 사랑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어 선택해야 해요. 오늘, 숨을 쉬어요. 그리고 들어보아요. 공황 상태의 공장 소음 뒤에 새들이 다시 노래하는 소리를요. 하늘이 맑아지고, 봄이 오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영혼의 창문을 열어요. 그리고 텅 빈 광장에 직접 닿지 못하더라도 함께 노래해요."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수도사의 말처럼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텅 빈 예배당에 직접 닿지 못하더라도 함께 힘차게 부활의 희망을 노래 부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부른 개회 찬송(167장)처럼, "부활하신 주님 나타나시니 천지만물 모두 새 옷 입었"습니다. "꽃은 만발하고 잎이 우거져 승리하신 주를 찬송"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곧 부를 폐회 찬송(436장)처럼,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이 지나고 새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합니다. 모두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만물이 거듭납니다. 인간과 동물과 산천과 초목이 모두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릅니다. 이것을 위해 지금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실 것입니다. 다시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고난 가운데에서도 위로를 받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고통 가운데에서도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면 땅 끝까지 선포해야 할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아멘. (2020.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