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보수 개신교 단체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바른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오직예수사랑선교회', '올바른인권세우기' 등 보수 개신교 단체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습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규탄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NCCK가 선거 다음 날인 16일 내놓은 입장문 중 차별금지법 관련 대목을 문제 삼았다. 입장문 중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이자 인권선진국으로 나아가는 필수 요건이다. 제21대 국회는 온전한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섬으로써 소수라는 이유로 그 존재를 무시하는 혐오와 차별을 넘어 환대와 평등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 시행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보수 개신교 단체는 이를 집중 성토했다.
보수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 혐오선동이나 차별금지법 무력화 시도는 새삼스럽지 않다. 실제 어제 NCCK 규탄 기자회견을 주도한 이는 최근 적극적으로 반동성애 활동 중인 주아무개 목사였다. 그러나 어제 있었던 기자회견은 예사로이 지나칠 수는 없다는 판단이다.
바뀐 의회권력, 보수 개신교 불안 자극했나?
4.15 총선 결과 정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의회 의석 180석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개헌 빼곤 다할 수 있는 의석수다. 마침 총선 다음 날 NCCK는 입장문을 내고 차별금지법 제정, 시행을 주문했다.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시점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 단체들을 중심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라는 압력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 법은 이제껏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 선동과 보수 야권의 발목잡기로 인해 차별금지법은 공론화 단계에서 좌절되기 일쑤였다.
보수 개신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의 취지는 동성애 조장과 거리가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차별금지법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권기본법"이라고 설명한다. 이번에 보수 개신교계로부터 성토 당한 NCCK도 반박 입장문에서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처벌하기 위해 필요한 법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차별인지를 밝히는 기준이며, 그 차별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선언하는 의미가 더 크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은 이후 각론을 재정비해 나가는 기초를 제공하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보수 개신교의 입장이 사실에 부합하느냐를 두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보다, 보수 개신교계는 차별금지법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때 마다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이들은 2017년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 표결 과정에 개입했다. 청문회에 참석한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그야말로 문자폭탄을 보내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당시 표결에 참여했던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견딜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언론도 이들의 중요한 타겟이다. 차별금지법, 혹은 성소수자 관련 의제에 우호적인 보도가 나오면 비판 댓글이 잇달아 달린다. 댓글 내용을 보면 기사 본문을 꼼꼼이 읽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기사와 작성한 기자를 원색적으로 성토하고, SNS를 통해 비판 여론을 확산시킨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간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자유한국당 시절부터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 선동에 편승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채익 당시 한국당 의원은 2017년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 후보자에게 동성애 관련 입장을 물으면서 "성소수자를 인정하게 되면 근친상간, 소아성애, 시체성애, 수간까지 비화될 것"이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 지난 해 5월 황교안 전 대표는 세종시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12월 안상수 의원 등 국회의원 44명이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채익 의원은 울산 수암성결교회 장로이고, 황 전 대표는 전도사 시무경력을 가졌으며, 안상수 의원은 한국당 기독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보수 개신교와 보수 야당은 그야말로 '초록은 동색'이었던 셈이다. 보수 개신교의 집단행동과 보수 야당의 발목잡기는 차별금지법의 국회통과를 막은 으뜸 요인이었다.
이제 4.15 총선 결과 의회권력은 민주당에게 넘어왔다. 만약 민주당이 인권단체의 오랜 요구를 받아들여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로 방향을 정하면 보수 개신교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보수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 NCCK 성명서에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바뀐 의회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모호한 태도 일관했던 민주당, 이번엔?
한편으로 어제 보수 개신교계의 기습 기자회견에 감사한 마음이다. 잊고 있었던 '차별금지법'이란 의제를 환기할 수 있도록 해줬으니 말이다.
국민들이 21대 국회에 바라는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차별금지법은 이번만큼은 꼭 통과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마침 오는 9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을 다시 발의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민주당에 강력히 촉구한다. 민주당은 성소수자 의제가 불거질 때 마다 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지난 총선 격전지였던 서울 광진을에서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후보와 미래통합당 오세훈 후보는 ‘동성애'를 두고 한 바탕 설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오 후보는 자신은 반대한다면서 고 후보에게 입장을 물었다. 이때 고 후보는 "동성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성적 지향이 찬반의 대상도 아니고, 국민적 동의가 필요한 점은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정의당도 "성소수자는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찬성과 반대의 대상이 아니다"며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달리 동성애자들의 사랑은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혐오 발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여성이라거나, 피부색이 어둡다 거나,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거나 하는 이유로 차별이 횡행한다. 이 같은 현실에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
민주당에게 바란다. 민주당이 눈치 볼 대상은 없다. 민주당이 180석 의석을 확보하고도 보수 개신교계의 눈치 보다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룰 경우 더 큰 역풍에 직면할 것이다. 국민이 민주당에게 의회과반 의석을 준 건, 소신 있게 입법 활동을 하라는 주문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 선동을 볼 때 마다 부끄러웠고, 그 누구보다 성소수자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부디 차별금지법이 21대 국회에서 꼭 통과되기 바란다. 그리고 민주당이 차별금지법 통과에 얼마만큼 의지를 보이는지 눈 부릅뜨고 감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