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2:10-13, 빌립보서 2:1-4, 요한복음 15:9-15 -
얼마 전, 나태주 시인이 저에게 책을 보내왔습니다. 『어린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집입니다(서정시학, 2020). 종종 제 설교에 나 시인을 인용한다는 것을 누굴 통해 들으신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책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정말 큰 영예입니다. "당신이 오늘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짐짓 사랑한 일이고 나아가 그리워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고 거룩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책머리에> 이렇게 시작하는 시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시는 <모성>입니다. "집에 있을 때나 / 밖에 있을 때나 자식은 / 엄마에게 // 길잃은 짐승이거나 / 배고픈 짐승이다 /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 밥이나 먹고 다니는 거니? // 아니다 / 아내에게 있어서는 / 남편도 마찬가지 /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 밥이나 챙겨 먹었나요?"
누군가 쓴 <남편>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집에 두고 오면 근심 덩어리 / 같이 나오면 짐 덩어리 / 밖에 내보내면 걱정덩어리 / 마주 앉으면 웬수 덩어리." 또 있습니다. "늦으면 궁금하고 / 옆에 있으면 답답하고 / 말 걸면 귀찮고 / 말 안 걸면 기분 나쁘고 / 누워 있으면 나가라 하고 싶고 / 나가 있으면 신경 쓰이고 / 늦게 들어오면 열 받고 / 일찍 들어오면 괜히 불편하고 / 아주 이상하고 / 무척 미스터리한 존재입니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쓴 이 글의 제목도 <남편>입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어제 종영한 JTBC의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부부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 용서는 가능한 것인지 등의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드라마의 남자배우 박해준(이태오 역)과 같이 무책임한 남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우리가 가장 간과하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마리아, 천사, 동방박사, 심지어 헤롯까지 모두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단역이나 조연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메시아 탄생 이야기의 당당한 주연입니다. 마태복음 1:18-25절을 자세히 보면 요셉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주어집니다.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겁니다. 당장 파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를 깊이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꿈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아무리 천사가 나타났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니,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분명 며칠을 심각히 고민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따랐습니다. 성서는 이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사랑이 깊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아픔과 수모를 묵묵히 짊어졌습니다. 요셉의 '사랑의 아픔'이 있었기에 메시아 탄생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메시아 탄생 이야기의 단역이나 조연이 아니라 또 한 명의 당당한 주연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교독문 고린도전서 13장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입니다. 바울은 '아가페'(agape)라는 단어로 사랑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단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인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eros)나 친구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래 그리스어 자체에서 '아가페'에는 그런 뜻이 없습니다. 호머(Homer) 이후 그리스 문학에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가파오'는 자주 등장하지만, 그 명사인 '아가페'는 성서에만 등장합니다. 그 용어는 바울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말입니다. 플라톤은 『향연(饗宴, Symposium)』에서 에로스를, 우리를 완성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사랑으로 묘사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넘어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사랑'이라는 용어는 '아가페'나 '필리아'로 표현되며, 이 둘은 의미의 차이가 없는 동의어입니다. 다만 아가페가 필리아보다 좀 더 내적(內的)이고 심오한 어감(語感)을 가질 뿐입니다. 성서에서 아가페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도,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서로 사랑'(이웃 사랑)에도 사용됩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이나 사람이 모두 아가페의 주체이며 또한 객체입니다.
바울은 이런 아가페가 없으면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 당시 이교도의 예배, 특히 디오니소스 예배의 특징은 시끄럽게 꽹과리를 치거나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관심을 끌어내거나 귀신을 쫓아내려는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비록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이교도의 예배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예언은 설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이 없고 정죄만 있는 설교는 사람들을 무섭게만 할 뿐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은 남을 멸시하기가 쉽습니다. 믿음도 때론 잔인해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의 가슴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구제는 사랑과 비슷하게 보이는 윤리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랑 없는 구제처럼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구제는 사랑이 아니라 거만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건 순교를 뜻합니다. 순교는 마카비 시대 이래 유대인들이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하던 것입니다(다니엘 3:6). 그런데 그런 순교라 할지라도 그 동기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적인 행위도 얼마든지 거만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가페의 중요성을 설명한 다음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이 아가페의 특성 15가지를 하나씩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아가페는 주어(主語)로 의인화되어 나타나며 술어는 모두 현재시제의 동사입니다. 생생한 현장감이 묻어납니다.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참다'(makrothumein)라는 동사는 신약성서에서 언제나 사람에 대한 인내를 말하지, 상황에 대한 인내가 아닙니다. 초대 기독교 교부의 한 사람인 크리소스토무스에 의하면,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고 이에 보복하려면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참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이 '참다'라는 이 동사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신 것 같이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도 오래 참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함의 표시입니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대통령에게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Edwin M. Stanton)이라는 정치인입니다. 그는 링컨을 두고 '교활한 어릿광대,'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그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예의를 다해 대우해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의 유해 옆을 지키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가 누워있다. 사랑의 인내가 승리한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온유(溫柔)는 인자함입니다. 과거 스페인의 필립 2세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재임 기간 끝도 없이 종교재판을 열어 자기 생각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거라 믿었습니다. 그는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시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시기(猜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타인의 소유를 부러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이 가지고 있는 사실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후자는 아가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로 바울은 아가페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해 미안해합니다. 다섯째, 그래서 바울은 아가페가 교만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현대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는 원래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인도 선교사가 되어 평생을 거기에 바쳤습니다. 어느 날 만찬회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캐리를 망신시키기 위해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옛날에 구두 만드는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러자 캐리는 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즉 구두를 만들 수도 없었던 일개 수선공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아가페는 교만하지 않은 사랑입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일곱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계산적인 사랑, 거래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여덟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사람에 대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분노는 언제나 패배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아홉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악한 걸 생각하지(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 쓰인 '기억하다'(logizeshthai)라는 동사는 사람이 어떤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장부에 기록하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아픔을 인생이라는 노트에 기록하며 삽니다. 옛날의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삽니다. 하지만 아가페는 이 노여움의 기억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줍니다. 해방합니다. 열 번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악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보다 불행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기보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열한 번째로, 그래서 바울은 아가페가 진리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가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가페는 진실을 마주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용기입니다.
열두 번째로, 바울은 기독교적인 사랑, 즉 아가페는 모든 것을 참는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가페는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이의 잘못을 결코 백일하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교정시켜주려 합니다. 열세 번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믿기 어려울 때에도 믿는 힘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자녀라도 부모가 믿어주었을 때 그 아이는 부모의 믿음만큼 고귀한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그런 믿음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열네 번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또한 모든 것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희망이 없을 때에도 희망하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선생님이 바라는 만큼 성장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마지막 열다섯 번째로, 바울은 아가페가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견디다'(hupomenein)라는 동사는 매우 적극적인 동사입니다. 그것은 단지 소극적으로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참고 버티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7개의 긍정적인 설명과 8개의 부정적인 설명으로 모두 15가지의 아가페의 특징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래 참음, 온유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참음, 모든 것을 믿음, 모든 것을 바람, 모든 것을 견딤이 아가페의 7가지 특징입니다. 또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하지 않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이 아가페의 나머지 8가지 특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이 '사랑의 찬가'에는 단 한 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지난 세기 위대한 신학자의 한 사람인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말한 대로, 이 장에서 '사랑' 대신 '그리스도'를 바꿔 넣으면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 온전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래 참으시고, 온유하시며, 늘 진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셨습니다. 시기하지 않으셨고, 자랑하지 않으셨고, 교만하지 않으셨고, 누구 앞에서도 무례히 행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셨고, 성내지 않으셨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의 화신(化身)인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사랑, 즉 '필리아'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인 요한복음 15:13-15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한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 11:19, 누가 7:34)라고 하셨습니다. 엄격한 상하질서가 있는 가부장 문화 속에 주님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친구의 사랑은 '필리아'입니다. 필리아는 아가페와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서는 아가페와 필리아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칸트의 말처럼, 친구란 애정과 존중으로 이루어집니다. 친구 관계는 무엇보다 먼저 두 사람 사이의 기쁘고 자유로운 이끌림입니다. 친구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즐거워하는 관계가 친구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은 했습니다. "연인들은 보통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각자 상대방에게 빠져든다. 친구는 나란히 서서 어떤 공동의 관심사에 빠져든다." 생텍쥐페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같은 방향을 함께 주시하는 데 있다."(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친구 관계를 창조하는 것은 공동의 비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은 계약, 즉 공동의 비전을 갖고 동행(同行, companionship)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와 동행하십니다. 왜냐하면,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참 좋아하십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냉장고를 갖고 계시다면>이라는 작자미상의 시보다 이를 잘 표현한 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냉장고를 갖고 계시다면 / 당신 사진이 그 위에 붙어 있을 거예요. / 하나님께서 지갑을 갖고 계시다면 / 당신 사진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거예요. / 하나님께서는 봄이면 당신에게 꽃을 보내주고 / 매일 아침 해님을 보여주죠. / 그분은 우주 어디서든 살 수 있으시지만 / 바로 당신 마음속에 거처를 정하셨답니다. / 명심하세요 /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푹 빠져계셔요! / 고통 없는 날들 / 슬픔 없는 웃음 / 비를 동반하지 않는 햇살을 /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하루를 견뎌낼 힘을 / 눈물에 대한 위안을 / 앞날을 열어줄 빛을 / 당신에게 주실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 친구를 하루 종일 생각한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로, 그리고 필리아로 나타낼 뿐만이 아니라 에로스(eros)로 표현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에로스는 덜 고상하고 아가페는 더 고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가페는 천상적인 사랑이고 에로스는 지상적인 사랑이라고 구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가서(雅歌書, Song of Songs)가 성서의 일부라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아가서는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그 어디에서도 신을 언급하지 않는데도,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인간 영혼과 하나님 사이 관계의 유비(類比, analogy)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읽은 아가서의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가 2:10-13). 여기서 말하는 화자(話者)인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아가 2:1)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 '나'가 오늘 부른 찬송가 89장의 제목처럼 '샤론의 꽃 예수'로도 읽힙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이 '샤론의 수선화'가 아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가 2:16). 아가서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신부'로 표현합니다(아가 4:8-12, 5:1).
이처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이 깊고도 깊은 친밀함을 표현하는데 성서는 주저함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신실한 남편'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저 유명한 '고별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요한 17:21) 해달라고 기도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역시 예수께서 교회의 '신랑'이 되신다고 은유합니다(마가 2:18-22, 마태 9:14-17, 누가 5:33-39). 성서는 이렇게 풍성한 언어로 높고, 깊고, 넓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보여줍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 그것이 아가페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랑, 그것이 에로스입니다. 공동의 비전을 갖고 그것을 위해 끝까지 동행하는 사랑, 그것이 필리아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풍성한 상징과 은유를 통해 나를 귀히 여기시고,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시며, 세상 끝까지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하고 거룩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병상에 누운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하소연하는 시가 있습니다. 부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나옵니다. 제목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 저에게가 아니에요. /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숙맥이라서 /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세상에는 이런 남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시인의 아내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시에 화답하는 시 <너무 고마워요>를 한 젊은 시인(이정록 시인)이 대신 써주었습니다.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 이제 저이를 다시는 /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 하나님, 저 남자는 /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 몽당연필과 함께 산, /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온 남자예요. / 시 외의 것으로는 /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 한 여자 남편으로 /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 운전조차 할 줄 몰라 /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두 부부가 이렇게 졸라대니, 하나님이 참 곤란하시겠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너무 좋아서 냉장고 위에 여러분의 사진을 붙여놓고 하루 종일 여러분 생각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끔찍이 아끼시고 귀히 여기시며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부부의 날'이 있는 이번 주는 부부간에 서로 화해하시고, 용서하시고, 주님처럼 '사랑의 낮은 자리'에서 서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1-4)라고 오늘의 신약서신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겠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빌립보서 2:8) 주님의 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할 것입니다. 아멘. (202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