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서와 교회와 하느님과 경제활성화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적 상황을 막을 수 없다. 이것들은 오히려 팬데믹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팬데믹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인류사에서 처음이 아니다. 이외에도 인류는 지구촌 전역에서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빈부차별, 전쟁, 테러로 인해 위험한 상황을 수없이 겪어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세계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탄압하고 착취해왔던 교회 기독교의 성서적 믿음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대하는 세계관과 윤리관의 기초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천시하고 박해했다.
오늘날 전세계가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위급한 상황에 직면한 시점에서 성서근본주의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성서가 용도페기 처분될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 무지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아 장사를 벌리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종교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성서와 교회와 하느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보조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성서와 교회와 종교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해 있다. 특히 인류사회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성서와 예배와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다.
성서는 수천년 전에 삼층 세계관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이 발견한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와 호모싸피엔스 인간의 출현과 현대 철학이 인식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지하고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다. 물론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무작정 믿도록 기록된 교리책이나 더욱이 과학책이 아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맹신하는 성서근본주의 교회는 정치적이고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을 보호하고 거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위해 인간과 생명을 하찮은 존재로 폄하한다.
오늘처럼 위급한 때에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삶의 여정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에 대해서 진솔하게 고민하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주후 325년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치적인 야욕으로 니케아 신경을 만든 이후 적어도 지난 1700년 동안 교회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현세적이고 우주적인 깨달음의 참된 인간됨을 무시하고, 내세적이고 부족적인 교리와 믿음을 추종하는 상업적인 사이비 종교로 전락했다.
예수는 성직자도 교리주의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으며, 오직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 평범한 인도주의자였다. 오늘 트럼프 대통령의 이기적인 부족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로 인해 혼돈과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물론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문자적으로 믿는 성서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에 감동된 인도주의자들이다.
교회 기독교는 성서근본주의에서 해방되어 잃어버린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가르친 참된 인간됨을 따라 교회의 권위와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자신의 신앙과 삶에 가장 중요하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의 종교와 철학과 정치와 경제를 안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인간은 생물종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을 알 수 있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기에 호모싸피엔스라고 부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아의식을 통해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통해 고통과 절망을 느낀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경험하면서 허약감, 종속감,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러한 인간의 자아의식은 주전 960년경에 기록된 구약 성서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기 2장)에서 잘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믿음체계의 성서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죄(타락)-회개-용서-구원의 구속론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원죄론은 구약의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지 1500년 후에, 주후 5세기에 성어거스틴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교회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창작한 교리이다.
교회 기독교는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배반하고, 사람들을 멋대로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수를 원죄론과 구속론의 상업적인 도구로 삼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초적으로 구약 성서는 아담과 이브가 새로운 인간으로써 자아의식을 깨닫고 새로운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인간은 태초로부터 성스러운 생명이라는 원복(Original Blessing)의 사상이 성서의 핵심이다.
인간은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려고 영생에 대해 꿈꾸기 시작했으며, 초자연적인 힘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제도적인 종교을 만들고, 이분법적인 믿음체계를 세웠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생각하는 특이한 생물종이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Religion)와 영성(Spirituality)은 항상 인간과 공존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는 정신적인 생물종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화 과정에서 두려움의 부산물인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과 배타심을 자의반타의반 갖게되었고, 이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만든 제도적인 종교의 믿음체계는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을 정직하게 밝히지 못할 뿐만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의 해방과 영생에 대해서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분법적 교리들을 창작하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오히려 더 많은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원죄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체제가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악용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영생을 팔아먹는 것에 저항했으며, 그 대안으로 자율적인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구원의 길 즉 참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 하늘 위의 내세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내면과 관계들 속에서 매일매일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이 온갖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교의 붓다도 인간이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서는 길을 기존 종교체제에서 찾기 보다는 명상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았다. 붓다도 예수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부산물이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편견과 이기심과 욕심과 배타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와 붓다는 사심을 내려놓고 비우는 길만이 참 인간으로 자유하게 살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몸소 살았다. 그러나 후대에 추종자들은 기독교와 불교라는 종교체제를 만들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보상심리의 이분법적 교리와 전통과 형식의 믿음체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전은 원초적인 스승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기록들로 채워졌다.
역사적인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 즉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 축복과 징벌의 이분법적 교리와 공식은 사람들을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보다는 더 많은 두려움과 이기심과 편견과 배타심을 조장하고 더 큰 고통을 줄 뿐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가 산 것처럼 인간의 본능인 생존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에서 사심을 버리고 영원함을 누리며 만족스럽게 사는 참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예수는 영생을 순간순간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영생은 지금 여기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라고 선언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심층적으로 깨달은 진짜 바울은 영생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사는 것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 인간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얼나(靈我)이며, 순간에서 영원함 (영생)을 누리며 사는 참나이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은 두려움과 편견과 욕심으로 가득한 몸나를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참 인간이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은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 예수, 인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과 예수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성서 근본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하면 순간에서 영생을 누리는 참 인간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인들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은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예수, 바울, 석가, 노자, 장자, 톨스토이, 달라이 라마, 마이스트 에카르트, 간디, 유영모, 슈바이처, 마틴 루터 킹은 죽음의 두려움과 그 부산물로 생겨난 편견과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참 인간으로 살았다. 또한 이들에게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은 초자연적인 힘에 수동적으로 의존하고, 무엇을 관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경건한 체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나 정직하지 못한 믿음 속에 죽음의 두려움을 감추는 것은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서의 메시지도 아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순수하고 진실한 인간성 즉 참 인간됨의 확장이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의 솔직한 인간성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로 기록했다.
기독교인은 인간성을 무시한체 하느님을 느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참 사람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타난 예수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제도적인 종교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낡고 추악한 하느님의 의미와 하찮게 여겨졌던 인간과 생명의 의미를 180도로 뒤집어 엎고 새롭게 정의하였다. 성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를 기록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 아니라, 참 인간의 모범이었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성에서 종교체제의 간섭과 중개없이 자율적으로 참되고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후대에 등장한 성서근본주의는 사람들이 참 사람 예수를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으며,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느님을 맹신하여 참 인간 예수의 의미를 방해하고, 참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제도적인 종교의 권위에서 보지 못했고, 오히려 장터와 어부들의 바닷가의 삶의 현장에서 가르치는 참 사람 예수의 인간성에서 보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스러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아 알았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와 책임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성서는 예수에 대한 교리를 믿는 책이 아니라, 예수가 산 것처럼 사심없이 사는 것이 참 인간이 되는 길이고,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외부의 초자연적인 신이 지구로 내려와 만든 종교가 아니다. 물론 성서의 핵심도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의미 즉 하느님의 의미를 온전하게 살아내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는 참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우주적인 의미를 깨달음으로 시작된 현세적인 삶의 종교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기독교는 믿는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에서 하루하루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종교이다. 따라서 성서는 무작정 읽고 암송하고 억지로 믿어야하는 교리책이 아니라, 살아내어야 하는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 책이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시대의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요청한 것처럼 성서근본주의의 종교적인 낡은 인간에서 깨달음의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특히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급한 상황에서 성서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비과학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도전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의미있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우주적인 삶의 지혜서가 되어야 한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