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2:1-3, 히브리서 13:12-16, 누가복음 10:25-37 -
(이화창립 134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는 오늘의 말씀은 이덕주 지음, 『스크랜턴』(공옥출판사, 2014)과 이경숙, 이덕주, 엘렌 스완슨 지음, 『(한국을 사랑한) 메리 스크랜튼』(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을 참조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이야기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그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 야곱, 그리고 증손자 요셉도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모세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했으며 어머니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사무엘도 어려서 가족을 떠나 살아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물론, 신약의 세례요한도 집을 떠나 광야로 나가야 했으며 베드로와 바울, 요한 역시 모두 고향을 떠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살았습니다.
왜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편안하고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설고 불편한 타향살이를 해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 16:15)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낯선 땅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는 '선교사'(missionar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선교사들의 이야기였고,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도 그런 선교사들의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그중에서도 1885년 봄, 이 땅에 개척 선교사로 들어온 '스크랜튼'(Scranton) 일가족 이야기는 한국 교회사의 맨 첫 장에 해당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어머니와 아들의 아름다운 동역(同役)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은 1832년 12월 9일에 메사추세츠 벨처타운(Belchertown)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문의 목사 집안 딸로 출생한 메리는 어려서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여러 도시와 마을을 옮겨 다니며 교육과 양육을 받았습니다. 21세가 되던 1853년에 역시 미국 명문가 집안 출신의 한 청년 실업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3년 만인 1856년 5월 29일에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부부는 그 아기에게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겨우 16살이던 1871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결혼 20만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에게도 큰 충격과 아픔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는 이후 아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면서 교회 봉사와 선교 활동에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미국감리교회 해외여선교회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 단체는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Extend the Gospel to women by women)라는 표어를 내걸고 창립된 선교조직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 스크랜튼은 동아시아의 선교에 관한 정보와 소식을 접하면서 여기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봉건적 가부장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시 『은둔국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책에 실린 한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여성은 도덕적으로 존재 가치가 없다고 한다. 한국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반려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여성은 이름이 없다. 어릴 때 붙여주는 별명이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도 별명으로만 부른다. 그리고 대부분 '아무개 누이' 혹은 '아무개 딸'로 불린다. 그러나 갖고 있던 별명도 결혼하면서 사라진다. 그때부터 철저히 이름 없는(nameless) 존재가 된다." 스크랜튼은 과중한 가사노동, 남성과 격리되어서 살아야 하는 '규방 문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혼인, 재혼이 불가능한 과부들의 아픔, 그리고 사회적 공간에서 여성을 찾아볼 수 없는 차별문화 속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 아들 스크랜튼은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왔습니다. 유명한 홉킨스 학교를 거쳐 예일대학의 인문학부를 졸업했는데, 그의 동기 중에는 나중에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 된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도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티푸스를 심하게 앓던 중 간호하던 어머니에게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겠다"라고 말한 아들은 예일 졸업 후 뉴욕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고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했습니다. 당시 뉴헤이븐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을 마치고 뉴욕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했다는 말은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서 최상위 1%의 삶이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에 감복해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의사이자 목사인 선교사'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다짐했습니다. 보통 어머니라면 마흔 살에 홀몸이 되어 힘들게 키운 아들이 명문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었으니 말년을 편안하게 지내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외국, 그것도 선교사가 단 한 명도 들어가지 않은 미지의 한국에 개척 선교사로 나가자고 권유했습니다. 자신도 단지 아들의 선교를 돕거나 손자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결단이었습니다. 신앙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비범한' 어머니의 결단에 따라 아들 내외는 미국에서의 최상위 1%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스크랜튼 집안 '온 가족'이 편안하고 익숙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창세기 12:1)을 떠나 일렁이는 태평양 넘어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어머니 스크랜튼의 나이가 53세, 아들 윌리엄의 나이가 29세, 며느리 루이자 스크랜튼의 나이가 25세였고, 겨우 두 살짜리 손녀딸이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 어머니는 '버려진 아이들'(waif)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정동에 여선교부지를 구입하고 거기에 새 집을 지었습니다. 당시 이곳엔 초가집 22채, 작은 기와집 6채가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성벽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은 자갈투성이였고 사방에 냄새나는 시궁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집을 지으면서 시궁창을 없애고 하수구를 정비하고 모래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우물도 다시 팠습니다. 정원에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기암괴석을 놓았습니다. '디귿'(ㄷ) 자 형태의 건물 벽은 벽돌로 쌓아 올렸고 지붕은 조선식 기와로 올려 동서양 건축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교문은 당시 대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솟을대문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대문 앞에는 조선시대 궁이나 왕릉, 혹은 서원이나 향교 입구에 있던 하마비(下馬碑)까지 세웠습니다. 하마비란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그곳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리라'[下馬]는 뜻의 글을 새긴 비석을 말합니다. 그렇게 10개월의 공사 끝에 지저분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던 성벽 아래 동네가 완전히 다른 세계로 탈바꿈했습니다. 조선 시대 민간인 건물은 아무리 커도 1백 칸을 넘지 못했는데 새로 지은 학교 건물은 2백 칸을 넘었으니, 규모도 규모지만 그 웅장한 모습이 여느 궁궐 건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솟을대문과 하마비까지 갖추었으니 어머니 스크랜튼은 조선 시대에 이름도 없고 인격도 없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궁궐 같은' 건물에서 당당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조성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습과 문화는 여성을 차별하였으나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성경말씀대로, "보배롭고 존귀"(이사야 43:4)했던 것입니다. 이화학당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아들 스크랜튼은 정동에 진료소를 개설했습니다. 여기에도 '버려진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국왕의 특혜를 받아 국립병원 형식으로 세워진 재동의 제중원(濟衆院)과 달리 순수 선교사들의 노력만으로 설립된 스크랜튼 진료소에는 돈 없고 가난한 민중이 몰려왔습니다. 아들 스크랜튼은 "우리가 다룬 환자들은 대부분 극빈층에 속한 이들이고 가끔 버려진 사람들도 옵니다"라고 선교보고서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무료 병원'으로 소문이 나자 온갖 환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무렵 서울 시내엔 콜레라가 창궐하여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을 거리에 내다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 스크랜튼은 서대문 성벽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렇게 버려져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환자의 남편은 아내를 거기에 버리고 사라진 이후였습니다. 환자 옆에는 어린 딸까지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스크랜튼은 그 엄마와 딸을 데려다가 치료해 살려냈습니다. 그때 살아난 일곱 살 아이는 이후 이화학당의 두 번째 '영구 학생'이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간난이'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봉건적 여성격리 문화와 관습 때문에 스크랜튼은 여성 환자를 직접 만지며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여성을 치료할 수 있도록' 여성 의사가 절실했습니다. 어머니 스크랜튼은 이미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해외여선교회 본부에 여선교사 추가 파송을 요청해놓고 있었습니다. 아들도 한국에서 "어머니가 과로로 건강을 잃고 투병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리며 "여자 의사와 여학교 일을 도울 선교사 파송"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와 아들의 기도가 이루어져 1887년 여름에 메타 하워드(Meta Howard) 박사가 한국에 첫 번째 여성 의료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워드 선교사는 1888년 10월에 이화학당 아래쪽에 별도의 한옥 건물을 구입해 수리한 후 <보구여관(普救女館)>이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을 설립했습니다. 보편 '보'(普) 자에 구할 '구'(救)자의 보구여관은 '병든 모든 여인들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몸을 내보일 수 없었던 한국의 여성들에게 그 집은 단 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이 땅에 드러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이 보구여관은 마곡 이대서울병원과 의과대학 부지 안에 그대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아들 스크랜튼 의사는 계속 '민중 선교'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가 진료한 환자들은 대부분 전염병에 걸려 가족에게 버려지거나 너무 가난해서 치료비를 낼 수 없는 빈민층이었습니다. 스크랜튼 의사는 "나는 국왕의 환심보다는 민중의 환심을 사기를 더 원합니다"(I prefer the favor of the people to that of the King)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 안에 그의 선교신학과 신앙이 녹아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와 상의하여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설립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동은 경운궁과 경희궁, 그리고 양반 저택과 외국 공사관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가난한 환자, 특히 격리 치료가 필요한 전염병 환자들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환자들은 성문 밖에 버려져 죽었습니다. 1887년 7월에 다시 전염병이 돌았을 때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서울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전염병 환자와 빈민층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진료 시설이 절실했던 겁니다. 이에 어머니와 아들은 '선한 사마리아 병원' 계획을 세우고 서대문과 남대문 그리고 동대문 밖에 '시약소'(施藥所, dispensary)를 세울 부지를 찾아다녔습니다. 왜 성문 '밖'이었는가 하면 그곳이 바로 성서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여리고 골짜기'와 같은 곳, 즉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게 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크랜튼 모자(母子)는 곧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 성벽 안쪽 언덕, 그리고 남대문 시장 등 세 곳에 시약소 후보지를 발견했습니다. 애오개[阿峴] 언덕과 골짜기에는 조선 시대 어려서 죽은 아이나 연고 없는 시체를 묻는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 등으로 부르다가 '애오개'로 이름이 변했습니다. 애오개 골짜기 입구에는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던 정부 기관인 활인서(活人署)가 있었고, 실로 이곳은 일반인들이 접근을 꺼리는 '죽음과 질병'의 땅이었습니다. 남대문 안에는 조선 시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들을 수합하던 선혜청(宣惠廳)이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거기에 몸 붙여 사는 상인들과 노동자, 걸인과 부랑인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동대문 안쪽, 성벽 아래 언덕 일대엔 갖바치와 백정과 같은 천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아들 스크랜튼은 이렇게 이 땅의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 거기서 사는 버려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 서신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2-13)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처럼 스크랜튼 모자는 글자 그대로 서울의 성문 밖으로 나아가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 속에서 하늘의 치유의 은총을 전하는 시약소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 교육과 선교에 힘쓰던 어머니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정년(停年)을 1년 앞둔 69세의 나이에 어머니는 치료를 위해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어머니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생을 마치고 싶다"라며 강력히 선교지 복귀를 희망했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벌써 72세, 선교사로서 정년을 넘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건강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스크랜튼에게 한국은 단지 잠시 선교를 하다 떠나면 그만인 '방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한국은 생명을 바쳐 사랑하며 함께 살다가 묻힐 '본적지'였습니다. 결국, 스크랜튼 모자는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한국을 향했던 것과 똑같이 1904년에 다시 한국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선교지 복귀 후 어머니와 아들의 사역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칠순을 넘긴 어머니는 종종 자리에 누워야 했고, 아들도 3년 사이에 크게 바뀐 선교지 상황에서 선교정책과 방법을 둘러싸고 선교본부와 갈등했습니다. 결국, 아들 스크랜튼은 1907년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감리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난 형식상의 이유는 '자원 사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직속상관 해리스 감독과의 불화로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일본 선교사 경력 30년의 해리스 감독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퇴하기까지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를 지지하고 협력했던 대표적인 '친일파'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정년 은퇴하고 귀국할 때에는 일본 천황이 그에게 '훈2등 서옥장'을 주었는데 그것은 당시 일본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훈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의 가난한 민중을 사랑했던 스크랜튼 의사는 일본과 너무나 가깝고 한국과 먼 이 사람과 갈등했고 결국 그에 의해 감리교 밖으로 추방당해 이후 중국과 일본을 떠돌며 유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 스크랜튼이 서거하기 전에 생의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봉사한 일은 교육사업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906년의 진명여학교 설립이었습니다. 20년 전 처음 서울에 와서 이화학당을 열 때에는 학생 하나를 얻기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 척박한 환경에서 어렵게 얻은 이화학당의 초창기 학생 여메레(余袂禮 - 메레는 세례명 Mary의 한자 음역)가 그사이 어엿한 한국교회 여성 지도자로 성장하여 그에게 진명여학교를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스크랜튼의 여성 교육선교 20년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스크랜튼 선생님은 병약한 중에도 진명여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치며 제자 여메레의 일을 도왔습니다. 이듬해인 1907년에는 마지막으로 상동여자중학교를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이화학당의 초기 졸업생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돌아온 하란사(河蘭史 - 란사는 세례명 Nancy의 한자 음역)가 참여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조선 여성이 가르친다"라는 소식에 전국에서 배움에 굶주린 여성들이 몰려왔습니다. 어머니 스크랜튼의 한국여성 교육선교 20년이 꽃피는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풍성한 선교의 열매 앞에서 스크랜튼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한 해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였고 그 결과 우리는 바라고 기대했던 것 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복을 주셔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1907년 선교보고서에 쓴 이 말은 어머니 스크랜튼 선교사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1908년 메리 스크랜튼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4년 전 선교지로 귀환할 때 그는 이미 한국에서 생을 마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친정 부모님이나 남편이 묻혀 있는 미국의 하트포드나 뉴헤이븐 공동묘지보다 한국에서 함께 일하다 먼저 간 동료 선교사 헤론(John W. Heron)과 홀(William Sherwood Hall)이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삼기로 했습니다. 아들도 그런 어머니의 결심을 존중하여 선교사직 사임 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의 병상을 지켰습니다. 수개월 간, 생사를 오가는 마지막 투병 생활 끝에 어머니는 1909년 10월 8일 금요일 아침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77세였습니다. 이화학당의 후배 선교사인 힐먼(Mary R. Hillman)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스크랜튼 부인의 마지막 병수발을 들었던 간호사는 고통을 참아내는 그의 인내심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기도 한 번 하고, 찬송 한 장 부르고, 성경 한 번 읽은 후 힘을 얻어 쓴 약과 먹기 힘든 음식을 드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돌보는 이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배려하였는데 육체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완전 마비(혼수) 상태에 들어가기 사흘 전, 그의 요청으로 집안 하인들과 가까이서 함께 사역했던 토착 교인 몇 명을 초청하여 마지막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후 며칠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다가 1909년 10월 8일, 이른 아침 본향의 부르심에 응하였다."
장례식은 10월 10일 주일 오후에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스크랜튼 선생님의 상여가 남대문에서 떠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르기까지, 8km의 긴 운구행렬에는 "연령과 성별과 신분을 초월하여 수천 명이" 동행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대부인'이라 불린 어머니 스크랜튼 선교사에 대한 추모와 찬사는 선교사들이나 교인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언론지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추모 사설이 실렸습니다. "슯흐다. 부인의 열성과 인내하는 마음이여 그 짝이 실노 드물도다. 이런 열성과 이런 인내의 마음으로 인하여 한국 여자의 학문계에 밝은 빗치 비로소 드러나서 안방 깁흔 구석에서 술과 밥이나 짓는 법을 의론하던 여자들의 지식이 자라며 구습을 바리고 진리를 득신하며 장래 여자의 모섭이 되엿스니 이는 부인의 사업이러라. 엇지 다만 여자뿐이리오. 곳 남자라도 무릇 한국인 된 자는 부인을 향하여 절을 하고 치하치 아니리 업스리로다."("시크란톤 씨의 대부인 상사를 조상함," 대한매일신보, 1909.10.10.)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조성된 어머니 스크랜튼의 무덤에는 아들 스크랜튼 의사가 손수 마련한 소박한 화강암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3층 기단 위에 세워진 라틴십자가 모양의 묘비 한가운데에는 그리스어 알파벳 'IHS'(이오타, 에타, 시그마)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에수스'(Inбuç, 대문자로는 ΙΗΣΟΥΣ 또는 ΙΗϹΟΥϹ, 로마자로는 IHSOVS), 곧 '예수'의 약자입니다. 아들의 눈에 어머니는 오직 예수로 인하여, 예수를 위하여, 예수처럼 살기를 원했던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과 사역, 그리고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로 '예수'를 선택한 것입니다. 실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Mary)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불행을 겪었으나 오히려 그것을 예수 증언의 기회로 삼아 53세의 나이에 오직 예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복음의 불모지인 한국 땅에 개척 선교사로 들어와 25년간 예수의 사랑을 온몸으로 전하다가 그가 길러낸 수많은 한국여성과 그리스도인들의 애도 속에 7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하고 예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 스크랜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8년 후인 1916년에 이 땅을 떠나 중국의 대련(大連)으로 갔습니다. 다시 1917년 일본의 고베로 가서 '외로운' 마지막 5년의 삶을 살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1년여를 투병 생활 끝에 1922년 3월 23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65세였습니다. 유해는 고베항구에서 가까운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고, 묘비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어머니의 묘비와 같은 모양으로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한국교회로부터 '떠나간 인물'(departed man)로 '잊혀진 존재'(forgotten being)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기념하는 행사와 사업은 계속 이어졌으나 친일파 감독에 의해 쫓겨난 아들은 한국교회와 역사학계로부터도 망각의 존재가 되어 홀로 일본 땅에 누워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효자 선교사'였습니다. 명문대학 출신 의사로 미국에서 상위 1%의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말씀에 순종하여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일생을 - 어머니처럼 -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와 끝까지 함께 고독하고 험난한 한국 개척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스크랜튼 가족 2대가, 그것도 모자(母子)가 함께 선교사로 산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선교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평생 '동료' 선교사로 때론 같은 공간에서, 때론 다른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추진하며 서로를 북돋아 주는 아름다운 '협력 선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 한국에 온 어머니와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복이[복의 근원이]"(창세기 12:2) 되었습니다. 한국 여성과 우리 모두는 "[그들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2:3).
아들 스크랜튼과 같이 '의사 출신 전도자'로 추정되는 신약성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하게 실천한 신자의 표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누가복음 10:25-37)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 상처[를]... 싸매고... 데리고 가서 돌보아"(누가 10:33-34) 주었습니다. 주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 10:37) 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30여 년 전 이 땅은 '여리고 골짜기'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여리고 골짜기'와 같은 곳에 스크랜튼 어머니와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 땅에서 버림받은 여성들, 그리고 성문 밖에 버려진 환자들을 찾아 내려가 이념과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영원히 기억되고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화의 역사는 단지 이화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화의 역사는 한국의 여성사요, 교육사며, 근대사입니다. 한국인 모두의 역사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 선교의 위대한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화창립 134주년을 맞는 오늘, 이화대학교회의 모든 교우님들에게도 어머니 스크랜튼과 아들 스크랜튼 모자의 이 놀라운 믿음의 이야기가 기억되길 바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한국여성과 한국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구원의 신비를 함께 누리시길 바랍니다. (202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