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가 없어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조지 플로이드가 무릎으로 목을 눌린 채 반복했다는 그 말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오십을 바라보는 그가 마침내 '엄마,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며 의식을 잃었을 때 도덕적 자아로서의 우리 존재도 함께 무너졌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치의 수용소를 경험을 증언한 프리모 레비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이 아프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나는 그 지경으로 막 돼먹지는 않았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런다고 하여 인간으로서의 비애는 줄어들지 않는다.
두 아내에게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고 자랑하던 라멕의 노래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화시키려는 인간의 반역은 그칠 줄 모른다.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거듭 환기되어 가슴이 무거운 나날이다. 조롱과 혐오, 비난과 멸시, 모멸감을 안겨주려는 말들이 스멀스멀 우리 삶에 스며들면서 세상은 점점 사납게 변해간다. 상처의 기억은 우리 속에 침전되어 딱딱한 조직으로 변하고 그렇게 굳어진 마음은 이웃의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는 무능을 낳는다.
프란츠 알트가 쓴 <생태주의자 예수>에 나오는 이야기가 자꾸 떠오른다.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만난 어느 낯선 별이 지구의 안부를 물었다. "너 잘 지내니?" "그렇지가 못해.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태우고 다니거든." 그러자 그 낯선 별이 지구를 이렇게 위로했다. "까짓 것. 신경쓰지 마. 금방 사라질 거야." 물론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왠지 묵시적 예언처럼 들린다.
생각해보면 '조지 플로이드들'은 어디에나 있다. 노동현장에도 있고, 교육현장에도 있고, 병상에도 있고, 쪽방촌에도 있다.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이런저런 착취에 시달리는 여성과 남성들 사이에도 있고, 난민촌에도 있다. 생산성, 성공, 효율, 인종주의, 혐오, 배타성이 무릎이 되어 사람들의 목을 짓누르고 있다. 경청되지 않는 그들의 억눌린 신음 소리는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분출되어 고함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소리가 경청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달리느라 미처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듣지 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외면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신음소리는 우리의 인간적 존엄을 상기시키는 하늘의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이라는 책에서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추함을 드러내기 위해 귀신에 들린 채 비탈길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죽는 돼지 떼 이야기를 소설의 초입에 배치해놓았다.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게 인간의 병통이다.
코로나19는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문명에 대한 '멈춤 신호'이다.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지속을 위해 가장 소중한 분들임이 드러났다. 도저히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던 생산활동을 잠시 멈추고, 사람들의 이동이 줄어들자 대기와 수질이 맑아졌다. 기후 위기는 인간의 노력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생태계의 회복 가능성에 눈을 떴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안식을 명하셨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다. '숨을 돌리셨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기분을 상쾌하게 하다', '원기를 회복하다'라는 뜻도 내포한다. 쉼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나의 호흡만이 문제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자연스럽게 숨을 쉬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탐욕이 제도화된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쉬지 못하는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소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숨을 쉬지 못하는 이들 곁에 다가서야 한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