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 3:13-18,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17:11-19 -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습니다. 수도권과 충청권이 지금 걱정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그제 전 세계에서는 하루 최다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조용한 전파'가 특성인 이 바이러스 때문에 혹여 나도 확진자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코로나 19 확진을 받은 한 환자가 음압병실에서 작성한 글이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나는 코로나 19 확진자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여섯 살과 백일이 갓 지난 두 아이를 둔 엄마의 글입니다. 회사 동료로부터 감염된 남편이 병원으로 이송된 날 새벽, 아무 증상이 없던 자신도 감염됐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성이었습니다. 급하게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데리러 달려왔고, 병원에 격리된 엄마는 아이들 걱정에 뜬 눈으로 날을 샜습니다. 자신이 확진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아이들과 붙어 지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자신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우유를 먹이고 안아 준 시간, 아이를 재우려고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이야기를 나눈 시간, 뽀뽀해준 시간 등,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는 동안 아이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전파했을 수도 있기에 엄마의 마음은 미어졌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감염시켰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난 속에서 느낀 감사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9가지 감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랑 남편이 양성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낸 아이들이 음성임에 감사합니다. 긴급 상황에서도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실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격리 상태로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새벽 시간에도 감염을 막기 위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빠르게 확인한 보건소 직원분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어디가 불편하진 않은지 매번 먼저 나서서 따뜻하게 챙겨주는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병원시설팀, 영양실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병원에 격리됐다는 소식에 영양제와 책들을 병원으로 보내주려는 친구들의 마음에 감사합니다. 아이의 유치원에 연락하여 내가 확진자임을 밝혔음에도 따뜻한 응원의 연락을 남겨준 엄마들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를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이들과 갑작스레 떨어진 마음을 공감하며 쾌차하라는 응원의 댓글을 남겨주어서 감사합니다.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입에선 오히려 감사가 넘쳤습니다.
사실 "감사합니다"(Thank you)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감사하든 하지 않든 그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그런 감정을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사용하는 형식적인 말이 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늘 단순히 사회적 교제의 한 형식에 불과한 건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실제적인 감사의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때로는 그 감정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앞서 소개한 한 코로나 확진자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크든 작든 도움을 주었을 때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심원한 욕구를 느낍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일종의 공허감을 느낍니다. 감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채워져야 하는 내 안의 한 부분이 비어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도한 감사를 받을 때 역시 불안감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는 그런 감사를 받을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만에요"(You are welcome)라는 미국식 응답이나 "아이고, 아닙니다"(Please)라는 독일식 응답은 모두 저항 없이 감사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Don't mention it) 역시 이런 저항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법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슨 말일까요?
감사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의례적인 형식이 아닙니다. 감사를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또 누군가에 의해 내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이 단순한 말은 공격이 될 수도 있고 후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내 안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표현일 수도 있고, 내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누군가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성공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과 행동은 이렇듯 단순한 예법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존재에 관련된 심원한 사건인 것입니다(폴 틸리히, 『영원한 지금』[뉴라이프, 2012]).
그래서 성서는 감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독문 시편 50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시 50:23). 여기에 성서적 감사의 본래적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제사'(sacrifice)는 오늘의 예배로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제사(예배)의 본질이 감사라는 말입니다. 제사(예배)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가치 있는 것이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제물로 바치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제사(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런 운명을 인식하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 그러나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의 일부를 바칩니다. 그렇게 감사의 제사(예배)를 드리면서 그는 인간의 '유한성'을 시인합니다. 인간의 '일시성'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합니다. 성서는 그런 감사의 제사(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는 성서가 고발하는 '거짓 감사'와 정반대의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감사는 감사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에 감사하는 '거짓 감사'의 현저한 예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드신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한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세리와 따로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누가 18:11-12)라고 기도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체하면서 사실은 자신에게 감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잘 마치거나 혹은 힘든 노력 끝에 큰 성공을 거둔 다음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는 종종 나 자신에 대한 은밀한 감사의 방법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감사는 자신의 유한성과 일시성 그리고 피조성에 대한 겸손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위선(僞善)입니다. 성서의 감사는 자신의 존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특별한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편 편지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디모데전서 4:4-5). 이 말씀 속에서 감사는 새로운 기능을 얻습니다. 감사는 그 감사의 대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세속에 속한 것을 거룩한 것의 영역으로 바꿉니다. 세속에 속한 것의 속성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양(高揚)되어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은혜의 담지자(擔持者)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 내 앞에 차려진 음식을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땅에서 난 물질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5천 명을 먹이실 때에도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바친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들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정도의 가난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먼저 그 음식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수많은 떡이 생긴 이후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전에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적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은 단순히 그 감사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땅과 바다에서 나온 물질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17장(11-19절)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한 한센병 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한 이 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치유는 이 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출신 한센병 환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즉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선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감사를 곧 믿음과 동의어로 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은밀히 내세우는 거짓 감사가 아니라 나를 겸손히 비우는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주중에 "햇빛이 계속되면 사막이 되어버린다"라는 정호승 시인의 산문(散文)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비채, 2006]) 언젠가 시인이 몽골 남부에 있는 고비 사막에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지프차의 양쪽 문짝을 떼어내고 달렸습니다. 정해진 길은 없었고 앞서간 차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거나 새로운 길을 내며 끝없이 달렸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어찌나 더운지 생수를 있는 대로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잠시 멈췄을 때 지프차가 만들어준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시인은 왜 사막은 사막이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답니다. 그리고 사막이 되기 전에 고비는 어떤 곳이었을까 이렇게 상상해보았답니다. '고비는 비가 많이 오는 곳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고비는 신에게 햇볕을 내리쬐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신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다시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비는 햇볕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그 조건을 수락했다. 신은 고비에게 햇볕을 내려주었다. 고비엔 차츰 물이 말라가 살기가 아주 좋아졌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자 고비는 말라가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비가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고비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비엔 계속 햇볕만 내리쬐었다. 결국 고비는 사막이 되고 말았다.'
그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이런 상상을 한 시인의 생각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 성당에 가면 천주님께, 절에 가면 부처님께 이것도 해달라고 저것도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대 끝에 앉아... 절대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저의 그런 기도는 고비가 햇빛을 내려달라고 한 기도와 똑같습니다. / 저는 지금도 저의 삶에 비보다는 햇빛이 들기만을 바랍니다. 햇빛이란 좋은 일, 복된 일,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한 일 등을 의미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돈 많이 벌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자식들 잘 자라고 공부 잘하고, 오래오래 병들지 않고 잘살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원할 것입니다. /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은 결코 인간에게 그러한 삶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과 불행을,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알맞게 적절히 섞어 선물해줍니다. / 그러니까 고비는 신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섞어서 알맞게 내려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고비는 지금처럼 사막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늘 햇빛만 드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간 저 고비처럼 사막이 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 지금 자신의 삶이 사막과 같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너무 좋은 일만 바란 결과일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햇빛뿐만 아니라 비가 오기를 원해야 합니다. 비가 오더라도 비바람이 몰아쳐야 되고, 눈이 오더라도 눈보라가 몰아쳐야 됩니다." 시인은 참으로 거침이 없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사람과 살아봐서 잘 압니다.)
안성진 작곡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같은 음이 계속 이어지는 도입부의 단순한 멜로디가 오히려 인상적이어서 가끔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요.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요...." 사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이 노래의 제목은 오늘 읽은 구약성서 다니엘 3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18절은 개역개정 성경에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로 번역되어 있고, 그것이 오늘 이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성서는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은 "But if not"(KJV, NRSV) 혹은 "But even if he[He, God] does not"(NIV, NASB)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주전 597-538년)의 일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의 두라 평지에 금으로 높이가 약 30m, 너비가 약 3m인 거대한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 매우 홀쭉하게 생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국의 모든 관료에게 그 신상의 낙성식에 참여하고 예배하라 명령했습니다. 물론 누구든지 그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활활 타는 풀무불(화덕)에 던져 넣겠다 경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추천으로 바빌론의 관리가 된 세 유대 청년, 즉 사드락(Shadrach)과 메삭(Meshach)과 아벳느고(Abednego)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첩자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느부갓네살은 진노하여 이들을 뜨거운 화덕 앞에 세우고 위협합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7-18절). 이후 이 세 유대 청년이 일곱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화덕 속에서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고 살아나오고, 이에 놀란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마 다 아실 겁니다.
세 사람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결코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세 사람이 앞의 말, 즉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절)까지만 말했다면 그것은 완전한 고백이 아닐 것입니다. 그다음의 말, 즉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세상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에 절하지 않겠다'는 소중한 믿음이지만 완전한 고백은 아닙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절하지 않겠다'가 성서가 말하는 고차원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면 바뀐다"라고 믿습니다. 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하면 사람은 강해지고 하나님은 약해진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필요가 생길 때 작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도 하고, 금식기도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선택권과 주권을 배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단지 인간의 뜻에 응답하는 들러리처럼, 자판기처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생각을 하나님에게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바울이 "기도하면 바뀐다"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육체의 가시'(아마도 간질병) 문제를 놓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거절하셨을 때 매우 실망하고 시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9-10).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여 선을 이루어가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신앙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감사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악이 아니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감사의 삶을 사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염려라는 말은 그 어원처럼,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염려를 기도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염려 대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라고 확언합니다. 또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4)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말의 힘과 영향력은 생각 이상으로 큽니다. 그래서 악성 댓글 때문에 상처를 입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습관처럼 내뱉은 말은 어떤 것들입니까? '짜증나,' '따분해,' '그거 밖에 못해?' 이런 것들뿐입니까? 하지만 "추잡한 말과 어리석은 이야기나 점잖지 못한 농담 따위[는]...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말입니다"(에베소서 5:4, 공동번역)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로새서 3:15).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는 이 고통스럽고 힘든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입니다. 멜로디 비티(Melody Beattie)가 말하듯이, "감사는 풍성한 생명을 여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합니다. [감사는] 부정을 수용으로 바꾸고, 혼돈을 질서로, 혼란을 명쾌함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감사는] 한 끼 식사를 풍족한 잔치로, 평범한 집을 오순도순 정이 흐르는 가정으로, [그리고] 나그네를 친구로 바꿉니다"(멜로디 비티, <감사로 채워라>).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오늘 드린 공동기도문처럼 여러분도 이 코로나 시대를 감사의 힘으로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그 기도를 읽어봅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에도 감사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에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 먹고사는 데 힘겹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에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합니다."(작자 미상, <어느 병실에 걸린 시>)
감사는 내 존재를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포용입니다. 감사는 내가 다른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는 감격입니다. 감사는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나의 유한성과 일시성과 피조성을 인정하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가장 높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주권이 여러분에게 머물며 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충만한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0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