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자주 둔탁하다. 말의 주인(主人)이 말 뒤에 자신을 잘 숨기기 때문이다. 그 말 자체가 갖는 힘 때문에 그 말 뒤에 숨은 자를 보지 못한다. 말은 그 말 자체보다, 그 말이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나온 것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다수가 항상 옳고 소수는 항상 틀리지 않듯이, 소수가 항상 맞고 다수가 항상 틀리지도 않는다. 다수이든 소수이든, 맞고 틀리는 것은 다른 기준에 달려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의미가 달라진다. 혐오도 마찬가지이다. 혐오는 그 자체로 나쁜 의미로 들리지만, 무엇을 어떻게 혐오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너무 사랑해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잘 미워하고 경계해서 자신과 모두를 살려낼 수도 있다.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3)
차별과 배제도 나쁜 의미처럼 들리지만, 무엇을 어떻게 어떤 이유로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며, 관용이나 환대 역시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 누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나 배제됨이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단을 환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0).
죄인과 죄를 구분하고 분리하지 못하는 것도, 말의 둔탁함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십자가에서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는 말씀도 쿨하지 못한 것이 되고, 부모가 자식이 저지른 잘못을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갈등과 고통도 모르게 되는 셈이다.
말의 둔탁함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 말을 말씀의 빛 아래 두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 말을 덮고 있는 어둠이 벗어진다. 그 빛 아래서 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 말은 눈 먼 우상(偶像)이 되어 거짓 신(神)처럼 모두를 노예로 삼으려 들 것이다. 말(言)은 오직 말씀에 순복할 때 자기 자리를 찾는다.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