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보수교회,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는 보수교회는 '성정체성'에 관한 이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관용이나 환대의 결핍, 죄와 죄인의 구분 같은 문제 때문일까? 보수교회가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대한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직관적인 이유는, 오늘 날의 다원주의적 '시대정신'(Zeitgeist)이 갖는 어떤 도발성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성(性)이, 보수교회가 성경을 따라 믿는 대로,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각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성적정체성을 자기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사상은,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신(神)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정체성'을 각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보수교회에게는 '신성 모독적'인 주장으로 들리게 된다. 자신의 성을 자신이 결정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성'(性)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한참 전에,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Spiderman New Universe)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늘 날의 세대에게는 새롭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은 영화지만, 나처럼 뉴튼 물리학의 3차원적 세계에 익숙한 '근대적 인간'에게는 매우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우리의 영웅 스파이더맨은 늘 보던 대로, 백인, 남자,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한 우주(universe)에 있는 한 영웅이고, 이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들은 병행하는 우주들, 즉, '다중우주'들(multi-verses)에서 활약하는 여럿의 스파이더맨들이었다. 여자 아이, 어린 흑인 소년, 그리고 돼지도 '자신의 우주' 안에서는 스파이더맨이었다.
내 머리 속이 분열되는 것처럼 느낀 것은, 내가 오늘날의 '다원주의'(多元主義)적 세계에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혼란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조금 복잡하지만, 양자역학에서 파동처럼 입자도 유동적이라면 여럿의 입자들이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현대해석학도 마찬가지다.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이후, 해석의 대상인 본문은 횡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다른 본문들의 연속성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확정할 수 있다.
점점 복잡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무한한' 하나님을 배제하고 나면, 사람들은 어디선가 그 '무한함'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다원'(多元)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절대 기준이 없으므로, 예컨대, 파란색이 파란색으로 규정되려면 왼쪽에 노란색이 아니고 오른 쪽에 빨간색이 아닌 식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더 확대하여, 횡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그 '다름'(difference)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가 제안한 것처럼,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환대'가 그토록 중요해진다. 어떤 절대자가 아니라, 그 '낯선 타자'의 다름이 나의 나됨을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날 청년들 가운데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라는 '한 우주 안에서의 다양성'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이미 '해체'되었다. 여기서, '다양성'(多樣性)과 '다원성'(多元性)은 다르다. '다양성'이란 '하나의 단일하고 조화로운 체계'를 전제한다. '다원성'은 체계 자체, 우주 자체가 여럿이다. 즉, 하나의 우주 안에 하나의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병행하는 우주들 안에, 각기 그 안에 다른 중심들이 있는 것이다. 나의 '성'(sex)을 내가 결정한다는 '시대정신'의 저변에는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다. 그것은 '혼돈'(chaos)이다.
'하나의 세계' 즉, 그 세계의 창조주가 스스로 분열되어 있지 않고, 삼위 하나님으로서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세계를 하나로 붙들고 있는 조화로운 우주를 전제한다면, '다양성'의 무지개를 쫒는 '다원주의', 그것도 횡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며, 타자의 다름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병행우주는 황량한 '혼돈'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성'(性)은 남성과 여성뿐 아니다. 중성, 트젠, 양성, 혼성, 그리고 무성(無性)도 있고, 이제는 시시때때로 '성'을 바꿀 수 있는, 즉, 오늘은 남성이고 내일은 여성일 수 있는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도 가능하다. 마치 병행 우주들을 수시로 바꾸어가며 드나드는 '초인적(超人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오래 전, 시몬느 보봐르는, '상상 속의 죄악은 화려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실제로 죄의 세계는 황량하고 지루한 사막 같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원주의적' 세계가 그럴 것이다. '다양함'이란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전제하고 그 '통일성' 속에 있는 '다양함'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창조주가 약속한 조화와 생명의 충만이 있다. '다원주의'의 '다원성'에는 모든 우주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세계, 그 세계를 주관하는 '하나의 주관자'가 없다. 각자가 각자의 우주의 주인이지만, 그것은 감옥처럼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날 '성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이 새로운 세대는 이런 황량한 광야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황량한 광야로 친히 들어오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생명의 복음이다. 그분만이,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 곧 성령께서만이 그들의 모든 '우주들' 속으로, 그 각자의 우주 속에 갇혀서 '신[神] 놀음'(playing God)을 하는 그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다. 그 복음을 어떻게 '우리가, 교회가' 전해야 할지, 그것이 진짜 고민거리이다.
사실, '신(神) 놀음'은 보수교회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우리도 예배당을 숭배하고, 사람인 목회자를 숭배하고, 돈을 숭배하고, 탐욕을 숭배한다. 그 세계 역시 해체의 대상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모두가 형태는 다르지만,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죄가 죄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참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없이하실 수 있는' 그 아들의 복음 앞에 엎드러져야만 한다. 거기에 이 광야를 벗어나는 길이 있으리라. 거기에, 수많은 파편처럼 조각나버린 이 아프고 비참한 세계를 오직 그의 말씀으로 붙드시며, 결국 풍성한 다양성 안에서 조화와 생명의 동산으로 회복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나라가 열릴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