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종교를 가질 때 무조건 '덮어놓고'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도 하느님을 그런 식으로 믿었을까? 아니 예수님이 믿기나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아니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좀 생각해보자.
물론 믿음이라고 할 때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직접 보고 체험하지 않은 것을 제 3자가 거기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그러리라 인정하는 것 아닌가. 이른바 '승인으로서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덴다고 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손을 덴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믿는다. 그러나 직접 뜨거운 불에 손을 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덴다고 하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남대문에 문턱이 없다고 하는 것을 남대문에 가본 사람은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는이미 그것을 자기 체험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지 구태여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처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직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 사물에 대해 남이 하는 말을 받아들여서 안다는 뜻이다. 영어로 하면 'second-hand knowledge'이다. 한 다리 건너 뛴 앎으로서 참된 앎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분이다.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고 있던 분이다. 이런 분이 일부러 하느님을 '믿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직접 알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 주위에서 '믿슘니다'를 강조하는 분들이 많다. 믿음이 좋은 분들이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종교에서 일방적으로 이런 종류의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처럼 종교적 삶에서 최상의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특히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지각 있는 인간에게 더 할 수 없이 큰 고역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성을 희생하고 독립적 사고를 몰수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종교적 삶에서 어떤 태도가 바람직할까. 물론 예수가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직접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스스로 깨달아 가는 것이다. 남이 주는 정답을 그대로 외우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 깨쳐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종교적 삶에서 추구해야 할 최상의 것은 '아하! 체험'의 연속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 구미에서는 기독교가 대대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 바뀜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의 변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바뀜도 결국 우리가 지금 말하는 맥락에서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 아닌가. 주어진 교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참나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가도록 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정으로 튼실한 것인지 한 번쯤 두들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오강남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명예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