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죽은 자가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를 조롱하는 기독교인을 보는 것은 괴롭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상대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반대로 상대에게는 쉬운 일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밝히고 정리해야 할 정의가 있을지라도, 자기의 삶을 그렇게 마감하고 간 망자를 조롱하는 일은 덕스럽지 않다.
죽음이란 망자와 그 망자를 보내는 너와 내가 모두, 심판주가 이 세상에 내딛은 그 발 앞에 멈추어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는 일이다. 거기서 그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망자는 이미 심판주 앞에 서 있고, 우리 중 그 심판을 피할 자도 없기 때문이다.
위태하고 안타깝다. 정부가 소모임 금지를 명한 것에 대해 잡아가려면 잡아가라는 식으로 불복종을 선언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억울한 면이 많다.
신천지 사태로 트라우마가 있는 사회적 정서로 보면 이해할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불공정한 면이 있다. 하지만, 권리와 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본질은 포기할 수 없지만, 권리는 양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나 성경을 믿지 못하게 하거나, 예배하는 신앙 자체를 금지하면, 그것은 저항해야 한다. 본질에 관한 탄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모임 금지는 불편하지만, 권리를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일에 해당한다.
사회 속에서 덕을 위하여, 악을 선으로 갚고,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도, 곧 은혜의 은혜 됨을 드러내기 위해, 억울한 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선한 양심으로 참고 고난을 당할 수있다(벧전 2:19). 사실, 그것이 고난을 통한 선교,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십자가를 살아가는 교회의 길이다(벧전 3:16-18).
교회에는 예배만이 아니라, 친교, 봉사, 선교 등을 위해 소모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유동적으로 할 수 있다. 지역 사회에서 망해가는 식당, 카페를 교회가 소모임으로 이용해줄 수도 있다.
이참에, 예배당 건물 중심이 아닌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를 세워갈 기회를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본질이 아니라 권리에 관한 문제를, 본질인 것처럼 권리주장을 통해 정부와 대립하는 것은, 그런 주장자체가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애초에 정치적이라는 의혹을 받을 수도 있다.
정부의 정책에 불복종하는 경우는, 진리에 관한 것이거나, 다른 시민들도 충분히 동의할만한 보편 가치를 무너뜨릴 때를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벧전 2:13-17)
교회가 교회됨을 지키기 위해, 진리에 관한 저항과 권리에 관한 양보를, 분별해서 대응하면 좋겠다. 주여,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함과 더불어, 지혜와 덕과 긍휼을 더하여 주소서.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