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냈던 70-80년대 중고청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캠프파이어였다. 임원들은 마당 중앙에 쌓아 놓은 모닥불까지 철사 줄을 타고 '좌-악' 내려와 불을 붙이는 순간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마지막 저녁, 눈물의 회개 기도와 함께 모닥불로 나와 모이면, 종종 자신의 죄들을 적은 쪽지를 불에 던져 태우곤 했다. 가끔 담당 장로님이 불쏘시개로 그 참회 목록 쪽지들을 잘 타도록 정리하는 장면도 흔했다.
왜 어린 시절 수련회의 '절정'은 항상 죄의 회개와 십자가여야 했을까를 돌아보게 된 것은, 신약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단지 십자가에서, 그것도 갈 3:13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지면서였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한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복음의 핵심이고 원리이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그 뒤이어 성취하신 부활의 복음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더욱 폭발적인 능력이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복음도 있다. 그것은 그가 드디어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거기서 '주'(Kyrios)가 되셨다는 사실이다(시 110편). 사실, '주(主) 기독론'이 실제로 심령에 와 닿지 않으면 성도는 세상에서 미약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십자가는 교회 안에 갇혀 있게 되고, 세상은 낯설고 버려진 곳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교회와 세상을 함께 통치하시는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세상 한 복판에서 펼쳐지는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기독론적 복음의 '절정'은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인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구주'(Soter, 救世主)가 되신다. 거기가 절정이다. 거기서 우리는 한 없이 위로받고, 다시 일어나 세상 한 복판을 그분을 따라 걸어갈 새 힘을 얻는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가장 큰 무게중심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주의 재림은 부록이 아니다. 칭의가 시작이라면 재창조가 그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셔서, 악과 악한 자와 불의와 죄와 오염으로 망가진 세상을 심판하시고, '의와 화평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시작된 그 나라를, 온전히 이루신다는 확신, 이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황홀한 확신에 찬 기다림으로 걷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무언가 계속 헛물을 켜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종종, 우리가 또 다시 갈라디아서 3:13의 '대속의 십자가'에서 멈추고 다시 돌아오는 현상을 반복하는 익숙함을 예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어린 시절 수련회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종종 '천사가 된 것처럼' 느꼈던 경험, 그리고 몇 주 후부터 다시 '마귀처럼' 살다가, 그 다음 해 수련회까지 다시 씻어야 할 죄들을 쌓으며 반복 된 그 경험을 돌이켜본다.
왜, 그 때 그 수련회들은 항상 골고다의 십자가로 끝났을까? 왜 복음은 항상, '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의 죄 사함과 믿음'의 캠프파이어의 불꽃과 눈물과 결심에서 끝났을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은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 너무 한쪽에만 치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어린 시절 수련회들도 그렇게 짜여 졌던 것은 아닐까?
가끔 수련회의 '신학'을 생각해본다. 수련회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신학에 따라 알게 모르게 계획되고 틀 지워진다는 생각이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올인(all-in)하는 수련회는 어떨까? 그러니까 수련회의 시작 첫날 저녁을 '언제나 중요한' 십자가로 하고, 다음 날은 '죽음을 이긴 부활 생명의 능력'을, 그 다음 날은 승천하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세상 속의 교회의 길을, 그리고 마지막 날은, '반드시 다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그분'에 대한 확신에 찬 '신천신지'(新天新地)의 돌이킬 수 없는 확신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기독론에 맞는 수련회가 될지 모른다.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1/4만을 선포한다면, 우리가 누리는 구원도 능력도 기쁨도 1/4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삶은,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만큼뿐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