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종교재판을 열었다.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재판장 고재영 목사)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인했다"며 고 변선환 당시 감신대 학장에게 출교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로 변 학장은 감리교단에서 쫓겨났다.
이 종교재판을 주도한 이가 2일 숨진 고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였다. 김 목사, 그리고 김선도-김국도 등 3형제는 감리교단 교세를 불리며 '수퍼 3형제'로 군림하기에 이른다.
이 희대의 종교재판 이전, 감리교단은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의 토착화에 앞장섰다. 학문적으로 토착신학을 시도한 이가 바로 변선환 학장이었다.
고 김홍도 목사가 고 변 학장을 쫓아낸 건 토착신학을 거세하고 성장주의를 감리교단에 이식하기 위한 시도라고 본다. 감신대 재학생, 졸업생 등이 속사정을 더 잘 알겠지만 기자가 볼 땐 그렇다는 말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후 감리교단은 타락일로를 걸었다. 2009년 고 김 목사의 동생인 엠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는 본인이 적법한 감독회장임을 주장하며 신도 50여 명을 동원해 감리교단 본부를 점거했다. 이후 감리교단은 수년간 법정 공방으로 내부 역량을 소진했다.
이뿐만 아니다. 고 김 목사는 김대중-노무현 민주정권 시절, 보수 단체의 집회에 빠짐없이 등장해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국가보안법 철폐, 사학법 개정을 추진하자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손잡고 극력 저지에 나섰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하자, 본인 스스로 좌파 정권과 맞서 싸운 투사 이미지를 씌웠고 그 이미지에 탐닉했다.
‘전광훈 현상'의 뿌리는 김홍도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전광훈이다. 고 김홍도 목사의 정치투쟁(?) 이력을 돌아보면 전광훈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실제 고 김 목사는 전광훈이 설립한 청교도영성훈련원의 총재를 지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시무하는 금란교회에 부흥강사로 초청하는 등 후견인 노릇을 했다. 전광훈도 고 김 목사를 '영적 아버지'로 추앙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광훈 현상은 '뿌리 깊은' 내력의 산물인 셈이다.
이 밖에도 고 김 목사가 한국 교회에 저지른 폐단이 적지 않지만, 더 언급하지는 않고자 한다. 단, 감리교단에 한 가지 바람을 전하고 싶다. 부디 한국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칭송하지 않기 바란다. 고 김 목사가 금란교회 교세를 10만 규모로 키웠다고 하나, 그로 인해 100만의 사람이 교회를 떠나갔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고 성소수자 축복 혐의로 기소된 수원 영광제일교회 이동환 목사에 대한 재판을 중단하고, 속히 목회 현장에 복귀하도록 지원하기 바란다. 20세기 끝자락에 종교재판을 벌인 감리교단이 21세기에 또 다시 이런 우스꽝스러운 재판을 반복하려는가?
끝으로, 고 김 목사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변선환 학장을 만나 통회자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