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김균진 연세대 명예교수(혜암신학연구소 소장)가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젠더주의기독교대책협의회 출범 기념 학술포럼에서 '자유에 대한 헤겔의 사상과 현대 성혁명의 자유에 대한 성찰'이란 주제로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해당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2부 현대 성혁명의 자유에 대한 성찰
1. 오늘의 성 혁명이 주장하는 자유의 개념
오늘 우리의 세계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발견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직면하고 있다. 이른바 "성혁명"이라 불리는 혁명은 최소한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인류의 사회체제와 질서를 범세계적으로(global) 바꾸어버리고자 한다. 동성애는 물론 인간의 모든 성적 행위를 법적으로 정당화시키고자 하며, 여자와 남자의 성적 정체성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생물학적 양성체제를 해체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성도덕 일체를 상대화 내지 폐기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울 때 그는 자기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성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성과 관계된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져야 한다. 성과 관계된 모든 행위에 대해 어떤 기준이나 규범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침해요 훼손으로 간주된다. 아무런 제한이 없는 성적 즐거움과 쾌락과 만족이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아니, 자유 자체와 동일시된다. 이를 가리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혹은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오늘의 성혁명이 주장하는 자유의 개념을 가브리엘 쿠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행복에 이르는 방법으로 자유와 제한 없는 성적 만족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약속이다. 당신의 즐거움, 쾌락, 행복, 복지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 당신은 독립적인 존재이고, 자주적인 사람이며, 당신이 나아가는 길에 그 누구도 심지어 교회라 할지라도 다른 규칙을 둘 수는 없다. 신은 죽었고 악마도 없다.
당신은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되지 결정하고, 코를 굽게 할지 바르게 할지, 가슴을 크게 만들지 작게 만들지, 성적 욕구를 남자와 채울지 여자와 채울지 아니면 양쪽 모두와 함께 만족을 채울지 결정할 수 있다. 당신은 아이를 죽일지 살릴지, 아이가 푸른 눈을 가지게 할지 갈색 눈을 가지게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아직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되는 시점이라도 치명적인 주사를 맞음으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당신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당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남녀의 정체성이든, 도덕이든, 가족이든, 교회든, 삶의 거룩한 성소든 간에 말이다."
2. 오늘의 성 혁명 운동의 역사적 배경
오늘의 성혁명이 전제하는 "조건 없는 자유", 어떤 기준이나 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순수히 개체주의적 자유의 관념은,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운동, 인권운동으로 소급된다. 이 운동은 먼저 로마 가톨릭교회의 독재와 억압에서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는 칭의론에 근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계급의 착취와 교황 독재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칭의론에 따르면, 각 그리스도인은 교황을 포함한 성직자의 중재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용서와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는다. 성직자가 선언하는 죄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죄용서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개인을 중재하는 성직자 계급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각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피를 아무리 빨아먹어도 만족하지 않는 "거머리" 같은 성직자 계급은 하나님이 세운 "신적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정치적 질서에 상응하여 만든 "인간적 질서"에 불과하다. 이로써 신적 질서로서의 성직자 계급이 와해되고, 성직자 계급의 전횡과 억압과 착취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가 선포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55 독일 신성로마제국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체결된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Augsburger Religionsfrieden)와 함께 종결된다. 이로써 가톨릭교회에서 개교회(루터교회)가 독립되고,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종교적 자유의 실현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유럽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1618년에 시작되어 1648년에 끝난 "삼십년 전쟁"이었다. 유럽 세계를 황폐화시킨, 가톨릭교회 측과 개신교회 측 사이에 일어난 이 비참한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난다,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런 평화조약"(Westfälischer Friede)으로 끝난다.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에서 결정된 종교적 자유(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개신교회 측의 분리)가 다시 확인된다. 나아가 각 영지의 제후가 그 영지에 속한 백성 모두의 교회 소속을 결정한다는 원리(cuius regio, eius religio)가 폐기됨으로써, 각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허용된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노력은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리하여 근대 유럽의 자유운동, 인권운동이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영국의 "권리장전"(Bill of Rigts, 1689), 프랑스 대 혁명(1789), 근대 무신론 등이었다(특히 과학적 무신론, 마르크스의 저항적 무신론). 이 운동들은 전체적으로 반기독교적, 반교회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성난 민중들은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 건물을 파괴하고, 성직자들을 추방하였다. 그 원인은 교회에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교회는 국가교회로서 국가 통치권과 결합되어 있었다. 교회 성직자들은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통치자 편에 서서 통치자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국가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은 곧 국가 통치계급을 비판하는 자로서, 비밀경찰의 감시와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근대의 자유운동, 인권운동은 반교회적, 반기독교적 성향을 갖게 된다. 기독교는 통치자 편에 서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그러므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 기독교 종교와 인간의 자유는 대립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마르크스의 저항적 무신론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그의 선언은, 인간의 자유와 기독교를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근대 자유운동, 인권운동의 반기독교적 성향을 대표적으로 나타낸다. 그가 쓴 "유대인의 문제"(Zur Judenfrage)에 의하면, 유럽의 국가교회는 기독교 종교의 타락일 뿐이었다.
3. 여성 인권운동에서 규범이 없는 성적 자유운동으로
근대의 이같은 반기독교적, 반교회적 자유운동과 인권운동의 추세 속에서 여성의 인권과 자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른바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난다. 그것을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정을 이루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계급투쟁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들의 입장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계급투쟁"은 "결혼에서 시작"한다. "1884년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이라는 책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상 최초의 계급투쟁은 일부일처제 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투쟁의 전개양상과 일치하며,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압제와 최초의 계급적 억압도 일치한다.'" 여기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 자유를 상실하고, 남성의 착취를 당하는 계급으로 파악된다.
이제 여성의 인간적 권리와 자유는 계급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제도의 철폐를 주장한다. 가족제도에서 해방된 여성을 "생산과정에 통합시키는 것이 여성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간주한다. "20세기의 모든 성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 그 영적 기원을 두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의 많은 여성들에게, 고등교육, 투표권, 은행계좌 개설, 직업 영역에서 고위직 진출 등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남성에 의해 억압당하는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여성은 남성 아래에 있는 열등한 존재, 그러므로 남성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페미니즘은 피임과 낙태의 합법화를 통한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 확보, 가족제도의 폐기, 남자와 여자의 성 정체성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구별이야말로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성 정체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산물일 따름이다. 따라서 각 사람은 자기의 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이리하여 남성으로 변신한 여성, 여성으로 변신한 남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성의 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성의 혁명은 성에 대한 모든 규제의 완전한 철폐, 곧 성의 완전한 자유화를 추구한다. 이 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의 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기초에 깔려 있다. 인간은 그 누구도 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는 존엄스러운 존재, 자유로운 존재이다. 룻소가 말한 것처럼 그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에 대한 외적 기준이나 규범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성 문제에 있어 모든 기준과 규범은 철폐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맡겨져야 한다. 이리하여 동성애와 포르노는 물론,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녀, 형제와 형제 사이의 근친상간, 미성년자와의 성 관계, 짐승과 관계하는 수간, 동시 다발적 혼음과 집단 성교 등, 인간의 성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자의 인권 침해자, 명예훼손자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의 완전한 자유화는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이요, 사회적 자유화의 관문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산업사회의 특징인 극단적 개인주의 내지 개체주의와 익명성이 작용한다. 오늘의 대도시와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의 사적인 일에 간섭할 수 없는 고립된 익명성의 개체이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Monade)와 같다. 자유는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각 개인에게 내맡겨진, 그러므로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는 완전히 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공공의 질서와 윤리를 깨뜨리고, 어떤 형태의 성 행위를 해도 간섭할 수 없는, 철저히 개체주의적 사회, 모든 성적 규범이 철폐된 사회로 변모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카니발 때, 동성애 관계에 있는 두 남성이 성관계를 하는 커다란 조형물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큰 화물차에 싣고, 도보에 서 있는 시민들 앞에서 시가지 행진을 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여학생들이 이를 보게 된다. 이런 일들이 인간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자유이고,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이며 사회 해방인가? 한국 사회는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이같은 서구 사회의 모습을 뒤따라가야 하는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포르노에 중독되어 쉽게 성 범죄에 빠지는 것도 자유의 이름으로 허용해야 하는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