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a. 14장 1-5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라는 문장에서 한글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그렇지만, de, but)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입니다. de(그러나, 그렇지만, but, however)라는 접속사는 앞 문장의 진술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면서 다음 문장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거나 옹호할 때 쓰는 반어법(反語法)적인 접속사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주창자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이 아닙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은 성령께서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목적에 반하는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께 영광께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남들을 섬기고 서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UT방언을 하는 자들이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워준다"고 주장한 것을 바울이 받아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랍어원어성경에서는 따옴표(" ")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방언을 하는 자는 은사들의 목적인 교회 덕 세움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고 비꼬면서 비판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성도들에게 은사들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목자-필자 주)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벧전 5: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대로 UT방언 기도가 준다고 하는 유익들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그와 같은 유익들은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할 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유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더욱 크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때" 누릴 수 있는 유익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UT방언의 은사를 가질 때만 그리고 UT방언으로 기도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유익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성서적이지도 않은 UT방언을 지나치게 미화하기 위해서 억지주장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UT방언의 유익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모두 UT방언 주창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그리고 정상적인 언어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하시는 더 많은 풍성한 유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 체험이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능력의 원천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비인격적인 UT방언 체험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 1:18, 21, 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2:2, 4-5)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십자가죽음을 당하신 그 희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자신의 덕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은사들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들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매우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은사들을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유익을 위하여"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개인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영적인 우월성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사를 오용(誤用)하거나 남용(濫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들은 도움이 필요한 주위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궁극적으로 교회공동체의 덕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써서 아가페 사랑의 속성을 말하면서 그러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은사 사용의 목적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고전 13:4b-5a; 고전 10:23-24, 10:33; 고전 12:7; 고전 14:12, 26):
(고전 13:4b-5a) "......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전 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남들을 혹은 교회공동체를-필자 주)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4:12, 26)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교회의-필자 주)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UT방언 주창자들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는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UT방언이 개인의 신앙과 경건에 유익하다는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들에서 "자기의 덕을 세워 주는" 방언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UT방언 기도를 하는 자들은 주위 사람들과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의 덕을 세워서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며 자신을 과시하고 교만하게 행한다고 비꼬면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대체로 UT방언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않은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영적인 교만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UT방언 은사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 자체가 그러한 은사를 갖고 있지 않은 신자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줍니다. 그들은 뭔가 중요한 것을 상실하며 사는 신령하지 못한 2등급 크리스천(the second class Christians)이라고 하시(下視)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UT방언을 하는 자신은 뭔가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spiritual arrogance)인 것입니다.
희랍어원어성경에는 "덕"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고"(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edifieth himself-KJV, He who speaks in a tongue edifies himself-NIV)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자기를 세우고"에서 "세운다"는 말인 "오이코도메오"(oikodomeo, edify)는 건축용어로서 나무기둥들과 벽돌들을 쌓아 집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은사들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자 자신을 세우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는 점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UT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들 즉 성경이 말하는 은사들이 그 목적하는 바로부터 크게 이탈되어 있다고 사도 바울은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바라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a)라는 구절도 UT방언 주창자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 모두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교인들 모두가 UT방언 기도의 은사를 사모하며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사용된 방언(glossais, speaking in tongues)이라는 말은 복수형인 LT방언입니다. UT방언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 모두가 LT방언을 말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mallon de, but rather) 예언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어서 그는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b)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방언을 말하는 자"('o lalon glossais, he that speaketh with tongues-KJV, one who speaks in tongues-NIV)도 복수형 단어(glossais)로서 LT방언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반복적으로 LT방언은 통역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LT방언도 통역이 되지를 않아 교회공동체를 세우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예언만 못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중얼거리는 UT방언은 통역이 불가능한 불소통의 소리이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지도 못하고 예언과 같은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의미없는 소리(meaningless voice, gibberish)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을 설명하면서 종종 로마서 8장 26절을 인용하며 그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56-8, 74-5; 김동수, 「방언, 성령의 은사」, 28-31.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73; 유기성, "방언기도는 비밀의 기도, 능력의 기도이다,"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aGazfEpK1JI, 2019년 5월 18년 접속.]: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필자는 그들이 어떻게 이 성경구절을 UT방언에 대해 설명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 등의 성경구절들과 연관을 지으면서, 나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서로 소통하면서 하는 기도가 UT방언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김동수 박사는 "성령의 탄식의 기도가 우리 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방언을 정의한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 14:2)과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의 영 안에서 성령이 직접적인 개입으로 하는 기도다. 둘째, 발성되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 셋째, 그 효과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된다. 넷째, 기도하는 사람의 이성(혹은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그 영이 열매를 맺음으로 신앙이 성장한다[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58.].
그러나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성령께서" 돕고, 그 사람이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잘 모를 때 "성령께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신다는 의미이지, 그 사람이 UT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UT방언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성경본문을 문자 그대로 읽어보십시오. 사람이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할 때에 기도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그 사람을 위하여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UT방언으로 혹은 그 사람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이어지는 27절의 말씀이 이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이 어떻게 "성도가 방언기도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로마서 8장 26절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UT방언 기도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여 약 3달 동안 체류하면서(행 20:1-3, "마게도냐로 가니라......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그 곳에서 쓴 논문과도 같은 서신입니다. 고린도교회가 UT방언으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이제 겨우 그러한 혼란이 수습이 된 상태에서 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UT방언 기도를 하라고 권장을 했을까요?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로마서에 언급된 은사들의 목록(롬 12:6-8)에는 방언이나 방언통역의 은사가 포함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인 로마서 8장 26절을 UT방언을 지지해 주는 성경구절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UT방언 주창자들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나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와 같은 성경구절들에 대해서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을 UT방언 기도라고 주장합니다[Ibid., 57.].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문맥을 벗어난 전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권순현, "가짜방언 기도와 성경적인 방언기도 (5),"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 dcj01WspWHI, 2019년 6월 19일 접속.]. 이 구절들은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충만한 가운데서" 기도하라는 권면의 말씀이지, 결코 중얼중얼 하는 UT방언으로 기도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했습니다. 만약 방언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그토록 유익하며 또 누구나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바울 이외의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서들에서 왜 UT방언 기도에 대해서 일체 함구를 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을 필자의 부연설명을 곁들여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는 방언의 은사만 귀한 것인 줄 알고 추구하는데) (내가 앞에서 말한) 그 아가페 사랑을 추구해라. 영적인 것들(즉 성령의 은사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라. 그렇지만 차라리(de, but) 예언을 하려고 해라.
2) 왜냐하면(gar, for, 왜 그런가 하면)[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ed.,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151-2.]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방언이란 원래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어떤 신(神, a god)에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알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을 하면서 영으로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3) 그렇지만(de, but) 예언하는 자는 (은사가 주어진 원래의 목적대로)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며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한다.
4)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은사가 주어진 원래의 목적과는 반대로) 자기의 유익을 도모한다고 주장하나, (그렇지만 오히려) 예언하는 자는 (은사가 주어진 원래의 목적대로)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
5) 나는 너희가 다 (기적적으로 주어지는 언어 혹은 외국어 구사 은사인) LT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그렇지만 오히려) 예언을 더 말하기를 원한다. 만일 LT방언을 말하는 자가 (다른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이 되지 않아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한다면, 예언하는 자만 못한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UT방언을 인정하거나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 신전(神殿)에서 행하던 이교도적인 신앙행습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비꼬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절제함이 없이 UT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교회에 혼란과 무질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LT방언도 통역이 되어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되지 않으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방언보다도 예언이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예언을 말하라고 격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