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a. 14장 1-5절
또한 "하나님께 (말)하나니"(lalei alla theo)라는 구절에서 "하나님"(theo)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o, the)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은 하나님은 "다른 이방종교들의 신"(god of other gentile religions)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John F. MacArthur, Jr., Charismatic Chaos, 228.]. 그들은 옛 습관에 따라 예수 믿기 전에 섬기던 어떤 우상신(偶像神, a god)에게 중얼거리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비꼬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사들에 관하여 논하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2: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예수님을 믿기 전에-필자 주)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Ye know that ye were Gentiles, carried away unto these dumb idols, even as ye were led-KJV, You know that when you were pagans, somehow or other you were influenced and led astray to mute idols).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덴(아테네)을 방문하여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행 17:22b-23a)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이 때도 누가는 사도 바울이 설교했던 내용을 기록하면서 정관사를 붙이지 않고 "(어느) 알지 못하는 신에게"('agnosto theo, TO THE UNKNOWN GOD-KJV, TO AN UNKNOWN GOD-NIV)라고 표현을 했습니다[Ibid.]. 이 신(神)은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비인격적인 우상신(偶像神)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하는 UT방언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 하나님, 즉 인격성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인격적인 대화로서의 기도가 아닐뿐 아니라, LT방언의 본질에서도 이탈한, 밀교행습의 일환으로 행하는 주문외기식의 중얼거림(gibberish, babble, mutter, mumbo-jumbo)이라고 비꼬면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에 의하면 사도행전에서의 세 번에 걸친 방언사건들(행 2장, 10장, 19장)에서 방언이란 "말하는"(speak) 것이지 "기도하는"(pray)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경적인 방언은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speaking in tongues to men, 복음증거)이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praying in tongue to God, 방언기도)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으로 말한다"는 말은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방언을 말한다"는 표현은 스물세 번 사용되었지만,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은 단 한 번(고전 14:14) 사용되었습니다. 그것도 가정법을 써서 UT방언을 비꼬면서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막 16:17)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행 2:4, 6, 8, 11)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말)하고 예언도 하니."
(고전 12:10, 28, 30)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고전 14:2, 4, 5, 6, 13, 18, 19, 21, 23, 27, 39)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만일 방언 말하는 자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자와,......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 딱 한 번만 등장합니다: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ean proseuchomai glosse)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For if I pray in an unknown tongue, my spirit prayeth, but my understianding is unfruitful-KJV, For if I pray in a tongue, my spirit prays, but my mind is unfruitful=NIV).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14절의 내용을 필자의 설명을 첨가하여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고전 14:14) "내가 만일 UT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UT방언 기도는 내가 하지도 않지만) 그러한 기도는 영과 마음이 분리된 채(혹은 제 정신을 잃어버린 채) 하는 기도여서 '나의 마음'(my understanding-KJV, my mind-NIV) 즉 나의 이해력과 합리적인 생각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당시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자기황홀경(self-ecstasy)에서 행하는 UT방언 기도는, 영 따로 마음 따로 하는 기도,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나 마약이나 술에 취한 자가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지껄여대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이교도들의 관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이스-로마의 신비종교는 황홀경에 빠져들어 중얼거리는 소리를 귀신과 소통하기 위해 생각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했습니다[John MacArthur, 「존 맥아더의 다른 불」, 216.].
오늘날의 방언주창자들은 "영으로 기도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나의 영이 기도한다"와 같은 표현에 신비스럽고 마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기도하고 말하는 것을 방언기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자신의 다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4절과 15절을 주해할 때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제 정신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제 정신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십니다.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 21:34, 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고전 16:13-1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벧전 4:7; 5:8-9)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사도 바울은 UT방언 기도는 마음(nous, understanding, mind, 이해력과 합리적인 생각)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뜻과 메시지가 있는 언어 혹은 외국어인 LT방언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기적적인 특별한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중얼거리는 UT방언을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그것을 권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서는 "그러나(de, but)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교회공동체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도록"(to edification, and exhortation, and comfort-KJV, for their strengthening, encouragement and comfort-NIV)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LT방언도 방언통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 의해 올바르게 통역이 된다면, 통역된 LT방언(말 혹은 언어)은 예언과 같이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주고 권면해 주고 위로해 주는"(고전 14:3)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UT방언을 하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거짓 교사들은 그것이 우상신(偶像神, a god)에게 하는 중얼거리는 기도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결코 사도 바울이 UT방언을 인정하거나 권장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방언이요 거짓방언이요 마귀가 주는 방언이라는 점을 넌지시 지적한 말씀입니다.
(고전 14:4-5)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위의 성경구절에서 4절의 방언은 단수형(glosse, "방언을 말하는 자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5절에 두 번 등장하는 방언은 모두 복수형(glossais,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4-5절에서 단수형 단어와 복수형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대조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계통이나 은사주의 계통의 방언 주창자들은 4절의 말씀,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웁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UT방언의 유익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UT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워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들은 UT방언이 개인의 경건과 신앙을 위해서 엄청나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김우현 드라마 감독은 그의 저서 「하늘의 언어: 하늘문을 여는 열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언어에는 놀라운 하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의 비밀을 찾아 떠났을 때, 우리 주님과 너무나 빼닮은 '하늘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어서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비아냥처럼 사람의 이성과 지식에게 그리고 왜곡된 전통에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에게 구원하는 하늘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이 하늘 언어에는 놀라운 하늘 능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며, 성도 개인의 덕을 세워 그 영(靈)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하늘 능력의 코드요 하늘의 전략이었습니다.
인간의 땅의 언어가 자기 의(義)와 욕망, 거짓말과 교만으로 오염되어 하나님과 소통하기 어려워진 이 때에 하나님은 이 귀한 하늘의 언어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영광된 하늘 보좌로 들어가는 하늘 축복의 길에 당신을 초대합니다[김우현, 「하늘의 언어: 하늘문을 여는 열쇠」, 앞표지 날개 페이지.].
김우현 감독은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부르며, "영광된 하늘 보좌로 들어가는 하늘 축복의 길" 혹은 "그 길의 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언 체험에 호기심을 가진 자들에게 무척 매력적인 문장표현으로 방언과 방언의 유익함에 대해 진술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모두 김 감독 개인의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자신 나름의 해석입니다. 필자는 그의 방언에 대한 설명이나 방언의 유익성에 대한 설명이 성서나 성서적 진술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설명의 근거를 어느 성경책 몇 장 몇 절에 근거하여 인용하면서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비스러운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방언을 일방적으로 미화(美化)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영돈 박사는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저술에서 김우현 감독의 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 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필자 주)이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1), 181.].
박영돈 박사는 이어서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 내에서 일고 있는 방언 열풍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침체한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방언 체험과 같은 피상적인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아니라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적인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Ibid., 181-2.].
김동찬 박사는 자신의 저서 「방언 바로 알기」, 제2장 "방언의 유익"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방언의 가치와 방언이 주는 유익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방언에는 성령께서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누어 주시는 영적 은사이며 놀라운 유익이 담겨 있다"[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59.]고 주장을 합니다. 방언의 유익에 대해 그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의 영적 성장과 축복
2) 방언과 교회의 부흥
3) 개인의 영적 회복과 갈증해소를 가져오는 방언
4)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
5)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
6) 방언을 통해 사람의 무지함을 도우시는 성령
7) 강한 믿음과 능력을 주는 방언
8) 다른 은사의 통로가 되는 방언
9) 방언을 통한 치유
10)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
11) 영적 전쟁에서의 무기가 되는 방언
12) 외국어 혹은 방언이 모국어로 들리는 이적[Ibid., 62-102. 조용기, "방언의 유익,"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 /watch?v=iu1Ln4JgiKM&t=89s, 2019년 4월 25일 접속. 김온유, "천상의 언어, 방언의 비밀과 엄창난 유익,"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MVukzN-CSc.].
이어서 김동찬 박사는 방언의 유익을 주장하면서 그 성경적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이는 자신이 성령 안에 있다는 확신을 통해 담대함을 얻게 된다(행 2:4, 10:44-46, 19:6).
2)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통해 사람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신다. 사람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행 2:11, 고전 12:7, 10).
3) 사람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초자연적으로 말할 수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4) 사람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행 10:46).
5) 사람은 방언을 사용함으로 그 심령이 강하게(Edify, Strengthen) 된다(고전 14:4).
6) 방언과 통역 은사를 통하여 교회가 강해진다(고전 14:5, 12-13).
7)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방언을 통해 노래할 수 있다(고전 14:15).
8) 통역의 은사가 있을 때, 사람들은 방언 속에 담겨진 자기 영의 비밀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고전 14:13-17).
9) 사람들은 방언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전 12:7).
10) 사람들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할 수 있다(행 2:11).
11) 방언을 통해 영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전 14:16).
12) 방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고전 14:16-17).
13)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다(고전 14:22)[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105-6.].
김동찬 박사가 방언의 유익성을 설명하면서 방언 개념에 있어서 UT방언과 LT방언에 대한 구분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들은 몇 가지 경우에는 성경본문의 문맥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인용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방언이 개인의 경건과 신앙에 너무나 엄청나게 유익하다고 주장을 하는 자체가,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사도 바울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 베푸심의 근본적인 목적(고전 12:7, 28-30에 대한 주해 참고)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란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적인 유익을 위해서 베풀어 진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란 남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남들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