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주일예배를 끝으로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의 '환대와 구원'이라는 주제의 설교가 마무리됐다. 송태근 목사는 이 주제 아래 '주의 은혜의 해'(누가복음 4:18-19), '축복상자'(누가복음 19:1-7),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출애굽기 3:7-10) 등 3주에 걸쳐 총 세편의 주일설교를 전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교회와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했다.
주제에서 나타나듯이 설교의 키워드는 '환대'였으며 그 환대의 대상은 개인적이면서 또 구조적인 억압의 문제로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연약한 이웃들이었다. 송 목사는 먼저 소외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치관의 전환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한 모세의 밑바닥 가치관에는 애굽의 가치, 즉 크기와 규모 그리고 세력에 기대는 세속적 가치가 움크리고 있었다. 세상적 힘의 논리에 기울어진 애굽의 사고방식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 없었고 모세는 결국 40년 동안 광야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 문명사회는 사실상 이러한 애굽의 가치를 동경하며 지금껏 달려왔다는 점을 강조한 송태근 목사는 소위 '감독자'를 위시해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낳는 인간 소외와 고통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애굽의)감독자들은 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요? 오늘 현대 문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단어일 것 같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감독자가 있어요. 억압된 제도,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어떤 상태, 전부 억압하는 존재들입니다. 인류는 여기에 속박되어 있습니다...고통이 개인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며 구조적인 악이 움크리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높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랫 사람들을 더 기계화시키고 수단화시키며 도구화시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애굽기 3:7) 이 감독자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구조적인 악입니다. 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나 이 세상의 부를 거머쥔 자들은 그것을 유지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수단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도구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합니다."
송 목사는 오날날 교회 또한 예외없이 애굽의 가치에 함몰되어 개인과 집단 단위로 예수의 이름을 팔고 기독교의 색깔을 덧씌워서 부를 축적하고 잘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해 왔다고 고발했다. 교회 역시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자기를 속여 왔는지를 떠나 규모가 선이 되어 버리고 정의가 되어 버렸던 점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그러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 때 '환대'와 '구원'의 교회 공동체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을 향해 손을 뻗치기에 앞서 개인과 교회 단위로 밑바닥에 스며있는 애굽의 가치, 즉 세속의 가치를 먼저 걷어내야 한다고 송 목사는 주장했다.
송 목사가 말하는 '새로운 출애굽'으로의 가치관의 전환은 다음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첫째는 얼마를 많이 모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를 많이 나누느냐이며 둘째는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가느냐이고 셋째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느냐가 가치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 목사는 광야 40년의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던 뿌리깊은 세속적 가치를 폭로하며 교회 현장에서 마주하는 비근한 예와 접목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연말에 일을 부탁하거나 맡기면 지금은 내가 사업도 잘 안되고 내가 돈 좀 벌면 내가 빵빵 돈좀 써가면서 헌신하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막말이 어딨어요. 하나님은 마음만 잡수시면 지푸라기도 붙잡으셔서 바위를 깨부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애굽화된 모세의 저변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송 목사는 마지막으로 "크기, 규모, 세력 그리고 고지로 압축되는 애굽의 가치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내 속에서부터 탈애굽화가 되어야 한다. 사회에 고지가 아니라 저지대로 낮은 곳으로 우리 청년들과 함께 그곳을 살피고 함께하는 그런 사역에 집중을 좀 하고 싶다는 부임 당시의 중심과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질됐거나 흔들린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삼일교회는 수년전부터 이른 바 '거리의 형제들'을 환대하는 사역을 벌여왔다. 개인적인 문제로 또 제도적인 억압으로 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주변의 노숙인들을 환대하며 삶의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는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냄새나고 더러운 존재로 취급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 노숙인들은 사실상 기성 교회의 환대 대상 목록에도 들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삼일교회의 '환대'는 뜻밖이었다. 얼마나 많이 나누느냐, 얼마나 많이 나가느냐, 얼마나 사느냐가 단지 구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은 구호가 아니다. 화려한 수식어를 앞세운 말보다 때론 거칠고 서툰 행동 하나가 존재의 무게와 깊이를 더해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