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e. 14장 26-33a절
필자는 최근에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방언통역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예배설교 중에 갑자기 UT방언을 약 10-20초 가량 하시더군요. 그리고 그 방언을 청중들에게 한국말로 약 3-4분 정도 통역을 하며 설교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통계시"(direct revelation from God)를 청중들에게 전달하듯이 통역을 하시더군요. 그 분이 통역문장을 끝내실 때마다 수많은 청중들은 "아멘" 소리를 연발했습니다[조용기 목사의 UT방언과 그 통역의 내용이 노우호 목사의 책에 녹취되어 있습니다[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286-7. 노우호 목사, "방언통역은 믿을 수 있는가?" [Youtube 동영상] https:// www.youtube.com/watch?v=bxYilz3u4oA, 2019년 6월 4일 접속.]. 필자로서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 성경이 말하는 방언통역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굳이 UT방언으로 말을 하고 그것을 한국말로 통역할 필요가 있을까? 한국인 설교자가 한국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청중들에게 곧 바로 한국말로 말하면 되는 것이지, 왜 아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UT방언을 중얼중얼 하시더니 왜 그것을 통역이랍시고 한국말로 다시 말하는 것일까? 그 분이 어떤 한국말로 통역을 하시더라도 순진한 성도들은 신기해 하며 "아멘"으로 화답할 것인데....... 이렇게 UT방언으로 말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이 통역하는 행동은, 성도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의 영적인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과 방언통역에 관하여 비판하며 경계했던 행동을 그 목사님이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발설하는 소리를 어떻게 그것도 자기 자신이 한국말로 통역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통역이 가능하려면 내용과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가진 LT방언(언어 혹은 외국어)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홉 가지 은사들을 나열할 때,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b)라고 썼습니다. "각종 방언 말함을"에서 방언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각종 방언들 말함을"('etero gene glosson)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성경들을 보면 "각종 방언들"(divers kinds of tongues-KJV, different kinds of tongues-NIV)은 각 나라의 다양한 언어들 혹은 외국어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LT방언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들 통역함"('allo de 'ermeneia glosson)이라는 표현에서도 복수형 단어(the interpretation of tongues-KJV, NIV)가 사용되었습니다. 중얼중얼하는 기도소리로서의 방언(UT방언)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UT방언은 모두 비슷비슷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unintelligible voice)이므로 "각종"(divers kinds, different kinds)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고 "방언들"(glosson, tongues)이라고 복수형으로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UT방언은 통역 자체가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의미와 메시지가 담긴 말이나 언어나 외국어, 즉 LT방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UT방언 주창자는 UT방언 통역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J. 목사는 방언을 통역(Interpretation)하는 것은 일반적인 외국어 번역(Translation)과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한다. 즉, 외국어 번역이 매 단어를 각각 다른 언어로 대치시켜 내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방언통역은 이와는 달리 전체적인 의미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때문에 방언의 길이가 설사 짧더라도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방언의 길이보다 더 길어질 수 있기도 하고, 반대로 방언이 길더라도 그것을 통역할 경우 오히려 짧아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254.]
바샴(Don Basham) 목사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 "방언통역은 번역(Translation)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방언통역은 외국어를 번역하듯이 한 문장이 끝나고 나면 각 단어마다의 뜻을 다른 언어 구조 속에서 하나하나 정확하게 번역하는 식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방언통역(Interpretation)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Don Basham, A Handbook on Tongues, Interpretation and Prophecy (Monroeville, PA: Whitaker Books, 1971), 71.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255에서 재인용.]
통역(Interpretation)과 번역(Translation)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통역(通譯)은 "말로 하는 번역"인 것이고 번역(飜譯)은 "글로 하는 통역"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인간의 언어를 다른 인간의 언어, 즉 외국어로 통역하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만약 통역은 번역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UT방언 통역을 주장한다면, UT방언 통역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얼마든지 통역자 마음대로 통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UT방언이 통역가능하다면 그러한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성경을 새롭게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UT방언으로 몇 마디 해 놓고는 마치 그 소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메시지인 것처럼 한국말로 통역을 한다면, 그것들은 성경 밖의 새로운 계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UT방언을 몇 마디 해놓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 한국말로 통역한다면, 얼마든지 그 설교자는 청중에게 사기(cheating)를 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not to think of men above that which is written-KJV,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NIV)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자들이 바로 이단자들입니다. 27권의 정경들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은 그 자체로 "종결된 하나님의 계시"(closed revelation of God)입니다. 사도 요한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계 1:1)를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은 요한계시록이 씌어진 90-95년경에 거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에 여러 교회들에서 사용되던 성서사본들이 정경(正經, Canon)으로 인정을 받아 수용되었던 것은 4세기말이었습니다. 397년 8월에 개최된 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The Third Council of Carthage)에서, 그 당시 여러 교회들에서 사용하던 성서사본들 중에서 성령께서 저술하시고 보존해 오신 신약성경의 책들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27권을 정경들(Canons)로, 다른 말로 하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115-6.]. 아마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여러 성서사본들 가운데에서 사도성, 영감성, 지역적인 보편성, 시간적인 연속성, 주제의 통일성 등을 고려하여 정경들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받아들였다"(ricipimus, received)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그 종교회의에 참석했던 교회지도자들이 정경들을 "결정했다"(decided)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신약성서의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쓰게 하셨고 성령께서 보존해 오셨고 성령께서 결정해 놓으신 정경들을 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받아들였다"(received)는 것입니다["Councils of Carthage," Wikipedia, [온라인자료] https://en.wikipedia.org /wiki/Councils_of_Carthage, 2019년 7월 3일 접속.].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혹은 교회지도자들인 교부들)가 성경을 결정했으니 교회가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회)에서는 성령이 저자이신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를 가지며 교회의 잘잘못까지도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경(Canon)이 완성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통계시들(direct revelations from God)은 없습니다. 정경이란 잣대(measure)를 의미합니다. 잣대는 기준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신앙적인 삶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바로 정경입니다. 정경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더 이상의 성경적 계시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The written Word of God continues speaking).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照明, illumination)과 깨닫게 하심을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unintelligible voice, UT방언)를 중얼거려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통역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넌센스이며,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독(冒瀆)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얼마든지 방언통역이 "정경들을 넘어서는 자의적인 계속적 계시"(arbitrary progressive revelation beyond the Canons)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건전한 내용을 가진 통역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통역자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게 될 수도 있고,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행하는 통역이라면 청중들에게는 속임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발설한 UT방언 소리를 "자기"가 통역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언통역이 아닙니다.
이어서 바울은 예언을 말할 때에도 차례대로 질서있게 해야 할 것을 아래와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9-31)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고전 14:32-33a)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Ou gar 'estin 'akatastasias 'o theos 'alla eirenes. For God is not the author of confusion, but of peace-KJV, NIV).
무질서, 혼란, 경쟁, 미치광이짓,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는 곳에는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무질서와 혼란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akatastasia, confusion)의 창조자가 아니라 화평(eirene, peace)의 창조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God of Peace)이심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살후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 13:20-2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UT방언과 통역되지 않은 채 행해진 LT방언으로 인해서 고린도교회에 평화가 깨어지고 무질서가 창궐하다는 소식을 제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접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자신이 1년반(18개월) 동안 고생하며 개척하고 이룩한 교회인데, 지금 그 교회가 혼란과 무질서에 빠져 있다니 영적인 아비로서의 마음이 얼마나 통절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전 14:33, For God is not the author of confusion, but of peace-KJV, NIV)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질서를 초래하고 화평을 깨뜨리는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아마도 "통역될 수 없는" UT방언과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이 무질서와 혼란의 주요인이었다고 사도 바울은 진단을 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