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적으로 성서를 읽고 직역적으로 맹신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승천했다는 "낡고 무의미한 거짓말"에 속아서 여전히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오직 기독교인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 위 천국에 올라가 거기에서 영원히 잘먹고 잘산다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우월적인 허황된 망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21세기 과학시대의 현대 인간은 138억 년의 우주 세계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발견했다. 또한 허블 우주망원경이 발견하기를, 우리의 우주에는 수천 억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계들에는 수천 억개의 별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우주 이외에 또다른 우주들이 대우주(다중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들이 살고있는 지구라는 작은 별은 이 광활한 대우주 세계에 속해 있으며, 우리의 별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는 한 자리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비행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에서 매일 하늘을 쳐다보지만 사실상 어디가 상층이고 어디가 하층이고 어디가 중간층인지 구분이 없다.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주 전체를 볼 수 없지만 우주의 모양에 대해서 도너츠 모양 등의 여러가지로 추측하지만, 우주가 상중하층이라는 삼층 세계관은 21세기에 비상식적이고 낡은 원시적 사고이다.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우리가 등장한 이 세계 곧 우리의 별 지구와 우리의 은하계와 우리의 우주를 떠나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간다는 것은 너무나 황당하고 유치한 거짓말이다. 더욱이 기독교 신자들만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올라 갈 곳은 없다.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 참된 인간으로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하루하루 의미있게 만족하게 자율적이고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예수 부활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신약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네 복음서들이 예수 부활의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독특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서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내지는 자서전적으로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심층적인 의미를 은유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의 처음 제자들도 아니며, 예수가 살아있을 때에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예수가 죽은지 약40년이 지난 후에 마가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으며, 마태는 약50년 후, 요한은 약 60년 후, 누가는 약80년 후에 기록되었다. 처음 기록된 마가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 보다 훨씬 짧다. 마태와 누가는 시기적으로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서를 기초자료로 삼아 자신들의 복음서를 편집했다. 그러나 각 복음서들은 다른 복음서들의 참고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책으로 고유의 메시지를 증거했다. 마가의 부활절 이야기는 8절인 반면에, 마태는 20절, 요한은 56절, 그리고 누가는 53절을 기록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복음서들은 원본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필사가들의 손을 거친 사본들이다.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서에는 예수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출현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후대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으로 기록했다. 다만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를 갈릴리에서 볼 것이라는 전달자의 말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 전달자가 말하는 '본다'(seeing)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제자들이 예수를 육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살아나는 것을 체험한다(experience) 또는 인식한다(be aware of)는 뜻이다. 원초적으로 고대성서는 문자적으로 기록된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진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지혜서이다. 1세기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있는 경험'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지 않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살아내는 능력을 체험한 것이며, 이제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제자들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이다. 성서가 밝히는대로, 예수의 육체는 죽었지만, 오늘까지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 즉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고 있다.
원초적으로 성서가 밝히는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인간세계와 분리되어 저 멀리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희생시켰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325년에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면서 확립된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술책이다. 성전종교와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예수를 반유신론과 반체제의 죄인으로 처형했지만,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은 죽일 수 없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으로 민중들의 가슴 속에서 더욱 거세게 불같이 타올랐으며, 그들의 과거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 예수 부활의 체험은, 나는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는 있겠지만, '너는 징벌을 받아 마땅한 더러운 죄인이라' 고 심판하는 재판장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정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즉 예수의 하느님은 인간을 더러운 죄인과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었던 하느님의 의미는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믿음이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계선과 분리장벽이 없다. 따라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중개인이 없다. 하느님은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이며, 공정한 분배의 정의이고, 폭력없는 평화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또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인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느님 예수와 중개인 예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상업적인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교리와 믿음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설득력과 효력과 신뢰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 그리고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예수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의 체험이다.
원초적으로 기독교가 탄생하게된 원동력은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었다.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방식과 비전이 기독교의 탄생을 이끌어왔다.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으로부터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첫번째 성탄절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간 이야기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야기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승천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는 학자들의 신학교와 성직자들의 성전과 귀족들의 궁전에서 시작되지 않았으며, 오직 예수가 산 것처럼 살려고 결단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의 공동체에서 탄생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치하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고통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되살아나는 경이로운 깨달음의 체험을 가졌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빛을 보는듯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예수가 살아났다고 고백했다. 다시 말해,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죽음과 암흑에서 헤메던 자신들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체험했다. 이것이 제자들의 참 사람 예수 경험이었고, 예수의 부활로 선포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내세적이고 유신론적인 믿음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참 사람 예수의 정신에 대한 깨달음과 교리적인 믿음과는 거리가 먼 현세적이고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삶에서 탄생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들의 사고와 언어 속에서 살아났으며, 예수의 삶의 모습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이 마치 그리스도(Christ)처럼 보인다고 해서 크리스찬(Christian)이란 말이 생겼다. 기독교인 즉 크리스챤의 의미는 교회가 만든 교리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수동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21세기의 현대기독교인들에게도 참 사람 예수 부활의 체험 즉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스스로 깨닫고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수의 정신이 내면으로부터 되살아나 외부로 드러나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조건없고 공정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과 편견을 떨쳐 버리고, 동료 인간들과 모든 생명들을 존중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깊고 넓게 확장하면서 조건없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모든 인류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빈부차별의 경계 넘어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사는 것이 두려운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공정한 분배의 정의 아래 사는 것이 두려운가? 예수처럼 말하고 사는 것이 두려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하기가 두려운가? 부활에 초대받으면 이 모든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믿음과 신앙은 교회 다니고, 성경 읽고, 나홀로 외롭게 개인적으로 하늘 밖에 있는 하느님과 보상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머리와 입으로 믿는 관념적이고 내세적인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다른 동료 인간들과 생명들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서로 존중하며 구체적으로 함께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고 의무이다.
결론적으로, 신약성서의 복음서 저자들이 고백하는 부활의 이야기들은 빈 무덤이 실제로 있었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걸쳤던 옷과 최후의 만찬의 성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밝히는 부활의 진리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그의 삶 그리고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다. 예수의 부활은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조건없는 사랑과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깨달음과 결단의 체험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축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우주적인 진리와 몸소 보여준 통합적인 삶의 방식과 비전에 초대받는 것이며,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 위 천국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솔직한 기독교인은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 세속적인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의 정신에 초대받은 부활의 사람이며, 예수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한다. 따라서 저 멀리 하늘 밖에 인간과 분리되어 떨어져있는 외부의 타자로서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떠나보내고,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서 예수처럼 살아간다. 하느님이란 믿어야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곧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서 참 사람 예수의 의미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참 사람 예수로 인해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소중한 개체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냄으로써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예수 부활의 체험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