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흡영 전 강남대 신학과 교수가 자신이 주창한 '도의 신학'을 풀이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6월호에 게재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앞으로 글로벌 신학은 서구고전신학의 로고스 모형과 해방신학의 프락시스 모형의 이원화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탈-서구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 본래 고향인 아시아로 돌아 온 기독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희랍적 사유의 유산인 로고스와 프락시스가 분리되어 근본 은유로 사용되던 서구신학이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3000년대의 기독교라는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 부대'를 필요하다. 나는 우리의 중심 사상인 도(道)가 그 새로운 가죽 부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밝혔다.
그의 자신의 도의 신학을 "도를 근본 은유로 사용한 도(dao) 모형의 구성신학을 로고스 신학(theo-logos)과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과 대비하여 '도의 신학(theo-dao)'이라고 칭한다"면서 "하나님은 형상과 질료, 영혼과 육체, 신성과 인성, 또는 로고스와 프락시스와 같은 희랍적 이원론을 초월한다. 3000년대의 신학을 위해서 도가 로고스나 프락시스보다 더 적합한 근본 은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앞으로 로고스 신학과 프락시스 신학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도의 신학이라는 모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했다.
동양 사상, 특히 노자가 <도덕경>에서 강조하는 도(道)와 신학자 김 교수가 말하는 도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김 교수는 "한자 도(道)는 '달릴 착(辶)' 받침에 '머리 수(首)'로 이루어져 있다. 도는 주체(體)와 운용(用), 존재(being)와 과정(becoming), 지(知)와 행(行)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도는 '움직이는 주체'이며, 항상 '과정 또는 도상에 있는 존재(being in becoming)'인 것이다. 또 도는 존재(logos)의 근원인 동시에 우주 변화(praxis)의 길(軌跡)이다. 도는 로고스나 프락시스 중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프락시스의 변혁을 타고(乘) 가는 로고스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는 존재의 근원인 도를 존재자가 존재하게 히는 무엇으로 정의하는 노자의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
김 교수는 "그러므로 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하는 서양적 양자택일적 선택의 길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both-and)을 동시에 껴안는 동양적 종합이다. 도는 우리를 로고스(존재)와 프락시스(과정)가 갈라지는 분기점 위에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품는 우주적 궤적(道)과 연합하는 역동적 운동에 참여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도의 신학'이 사유의 힘에 쏠려 있는 종래 신학과는 달리 생각하는 힘 뿐 아니라 실천하는 힘의 변증법적 종합을 꾀하고 있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도는 궁극적 길인 동시에 실재로서 앎(신학)과 행함(윤리)이 일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루면서 생명의 사회우주적 궤적인 도의 흐름에 따라 변혁적 프락시스를 구현한다"고 밝혔다. 노자가 무위의 위를 역설하며 인위적인 행위에 제동을 걸고 있다면 김 교수의 프락시스도 도의 자연스런 흐름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그 뜻이 통한다.
이처럼 김 교수의 도와 노자의 도 사이에는 이렇다할 차이점은 찾기 어려운 반면 공통점은 많았다. 차이가 있다면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도의 원리를 내세우면서도 '있음'으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았던 노자와는 달리 신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으로 인해 김 교수는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도의 흐름을 신의 실재에 참여 가능한 무엇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겠다.
김 교수는 서구신학의 뿌리인 로고스 신학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위로부터의 시각"이라고 정의했으며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프락시스 신학은 "사회학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시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도의 신학'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신-인간-우주의 관계론적 비전 안에서 생성한 상호주체성의 시각이다. 신-인간-우주적 그물망 속에서 연대와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 기운의 교류에 초점을 맞춘, 곧 영성적 기(氣, pneuma)의 시각, 다시 말하면 기-인간-우주적 시각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특히 김 교수는 "한국 및 동아시아 신학으로서 도의 신학은 관념 중심적인 로고스 신학 또는 운동 중심적인 프락시스 신학의 대립을 지양하고 '행동 하는 지혜'로서 통전적인 특성을 갖는다"며 "그 주안점은 교회의 정통교리(正論, orthodoxy)와 역사적 상황에서 예언자적 실천(正行, orthopraxis)의 분리를 넘어 성령운동의 기-인간-우주적 궤적에 부합하는 삶의 변혁적 지혜와 생명의 바른 길(正道, orthodao)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했다.
'도의 신학'이 씨름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정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가?" 또는 "우리는 성령께서 불어내는 기와 예수의 신명을 받아 참된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성령과의 적절한 교통을 통해 기운을 받아 신-인간-우주적 화해와 성화를 이루는 사랑의 과정에 올바르게 참여하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기독교의 3대 덕목(신앙, 소망, 사랑)으로 말하자면, 신앙이 정론(로고스 신학)에 치중하고, 소망이 정행(프릭시스 신학)을 강조한다면, 사랑은 정도('도의 신학')를 주장한다. 전통적 로고스 신학의 대주제가 신앙의 인식론이고, 근대적 프락시스 신학의 주제가 소망의 종말론이라면, 도의 신학의 대주제는 기-해석학의 목표인 사랑의 성령론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앙과 소망도 결국 사랑을 얻기 위한 것이고, 로고스와 프락시스도 생선그물과 토끼올무와 같이 결국 사랑의 도(道)를 득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의 도를 얻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한 사용했던 수단들을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로고스 신학(theology)의 전통적 정의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rens intellectum, faith-seeking-understanding)'이다. 이에 반해,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은 '실천을 추구하는 소망'(hope-seeking-praxis)'이라 한다. 그렇다면, '도의 신학'(theodao)의 정의는 '도(참된 삶의 길)를 추구하는 사랑(love-seeking-dao)'이라 할 것이다"라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