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평생 처음으로 대한민국 여권과 미국 입국 비자를 받은 날짜가 바로 1956년 8월 15일자였다. 그날이 바로, 대한민국 해군에서 명예재대한 날짜이기도 하다. 진해 해군 기지로 가서 제대 수속을 마치고 얼마 안 되는 짐을 싸들고 진해교회 목사님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서부, 옛날 카우보이들이 소떼를 몰고 광야를 누비고, 허리에 총을 차고 말 타고 다니던, 서부영화의 광경을 그대로 한, 미국 몬타나 주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기독교 인문대학에서 교수들과 학생들, 근처 교회 부인전도회 회원들과 목사님의, 그리고 재정보증인 의사선생님 부부의 극진한 환영을 받으며, 그렇게도 목말라 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영어도 모자라서 그랬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평양 대동강 언덕에 쓰러져 있던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원수"를 갚아 드리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미국 유학의 귀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지금 내가 아버지 원수 갚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학생활을 시작한 학기부터 줄곧 학기마다 교무처장 사무실 앞에 발표하는 우등생 명단에 올라 있었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철학과 종교학으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교수님들과 재정보증인 의사 선생님의 강권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공부를 하는 동안, 한국 여자 유학생과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하는 행운이 있었다.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는 즉시, 나는 순교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학 공부를 하고 목회자이며 신학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미국 동부 뉴욕시에 위치한 자유주의 신신학으로 "악명" 높은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의 정치적 혁명의 역사를 놓치고 있었다. 1960년 4.19 학생혁명은 알지도 못했다. 이어서 일어난 1961년의 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야기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 와서 군사쿠데타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왕래한 김종필 씨의 강연을, 별 흥미도 감상도 없이 듣고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남한군대가 정치 권력을 잡고 "반공"을 튼튼히 하고, 머지않아 북진 통일을 하게 되면,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날이 멀지 않겠다 싶어, 가슴 한쪽에서는 군사 쿠데타를 환영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신학 공부를 하는 동안, 목사 아버지로부터 받은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성서신학 교수들의 강의에 매료되어 심취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질문을 가지게 되었고, 오히려 인간들의 "하나님 이해"를 탐구하게 되었다. 특히 폴 틸리히의 신학을 배우면서, 나는 신학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고 당연하다고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서에 대한 질문,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깊어 지면 질수록,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구원"을 "인간 해방"이라고 믿게 되었다.
독일 나치 시대의 신학자, 특히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되기 전, 독일 감옥에서 써 내려간 "옥중서한"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순교자 아버지가 평양 어느 구석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군대 감옥에서 나에게 보내 준 편지처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치. 하늘나라의 정치에 가담한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세상,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주먹을 쥐기도 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 들불 같이 일어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해방운동에 동참하였고, 미국 신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나 반대한 월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는 나의 조국 한반도에서의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지, 아직 이루지 못한 8.15 해방,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와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하고,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갚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1969년 미국 남부 감리교도시라고 하는 테네시주 내쉬빌에 위치한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 역시 8월15일이었던 것 같다. 대학병원에서 순산한 우리 첫아들과 아내와 함께 이화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서울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통한 군사정권 연장에 반대하는 기독교 에큐메니칼 진영의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3선 대통령으로 청와대를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간접선거에 의한 "유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유신헌법과 유신정권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반대하는 대하생들과 지성계와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계엄령에 버금가는 이른바 "긴급조치"로 탄압하였다. 치열한 싸움 통에 수많은 학생들과 지성인들과 종교계 인사들이 투옥되고 군사재판을 받으며 옥고를 치루면서 1970년대가 저물어 갔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의 반유신 운동은, 결국 박정희 정권 내부의 갈등을 일으켜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 심복이라고 하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유신군사독재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학생들과 정치인들은 곧 민주주의 개헌을 통한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믿고 떠들었지만,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신군부를 자처하는 전두환 정보부장의 특수부대는 총칼로 무참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과 학생들을 학살하였다.
1980년, 첫 번째 815 해방을 눈물과 만세로 환영한 지 35년이 지났는데도, 남과 북은 분단돼 있었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은 다시 군사독재의 병영국가로 총칼로 독재하는 암흑세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중에 진보적인 기독교 에큐메니칼 집단지성은, "조국의 남북 평화 통일 없이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인식을 같이 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혀의회(KNCC)에 새로 통일위원회를 구성하고, 소규모의 "통일운동"으로 각종 크고 작은 모임으로 운동방향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모임을 개최할 때마다, 정보부와 경찰의 방해를 받고 모임을 가지지 못하거나 중도 해산을 당하면서도, 결국 중의를 모아,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논해야 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뜻t을 모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성사된, 그 첫 번째 모임이 1984년 일본 도쿄 근교의 도산소(東山莊) 모임이었다. 북조선의 그리스도교도연맹 지도자들은 이 모임의 취지에는 찬동한다고 하면서도 직접 참석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WCC) 주최로 스위스 제내바 근교의 글리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남북교회 지도자들과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통일협의회"를 열고, 허심탄회하게 한반도의 분단과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의 길을 모색하는 에큐메니칼 국제지도자들의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1986년과 89년 글리온 모임을 계속할 수 있었고, 스위스 뿐 만 아니라 미국 뉴욕에서와, 카나다 토론토와 몬트리올로 장소를 옮겨가며 남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숙식을 같이 하며, 평화를 이야기하고 통일의 그날을 꿈꾸고 있었다.
1987년 전두환 신군부가 계속해서 "유신정권"을 강제 지속하려 하자, 한국 민중은 들고 일어나, 결국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5년제 단기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헌법"을 통과시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해, 그 2월 새 헌법에 의하여 노태우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권은 1988년 2월 29일, 그동안 몇 년을 걸쳐 준비한 "통일 백서"를 연동교회당에서 열린, NCC 총회에서 총회원 저원 기립박수와 눈물로 통과 시켰다. 그 백서가 이른바 "88 선언"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