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아모스서 5장 18-24절, 시편 94편 1-7절, 마가복음서 1장 21-28절
설교문
[목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
우리 교단의 헌법 제18조 '목사의 의의' 중 2항 '목사의 직분'에 보면 목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목사는 본래의 인간성으로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인간으로나 일반 신자와 다를 것이 없지만 그 맡은 직책 때문에 일반 신자와 구별된다. 전적으로 교회를 담임하고 섬긴다는 의미에서 그 직책은 교회에서 가장 존엄하고 유용한 전문가적 직책이다." 길게 설명된 이 부분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목사도 일반 신자와 동일하지만 교회를 섬기기 위해 전문가적 직책을 수행하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헌법은 이어서 성경에 나타나는 목사의 직분에 대하여 여섯 가지를 나열합니다. '감독', '목자', '주의 종', '장로', '하나님의 사자', '청지기'입니다. 이 중 '목자'와 '하나님의 사자'는 영의 양식을 나누어 먹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직책을 담당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들인데, 목사는 설교와 교육을 통해 이것을 실행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은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적용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만, 목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있거나 죽음을 맛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금-여기, 즉 21세기 한국이 아니라 그 때-거기, 수천년전 중근동 지역에서 쓰였고, 우리말이 아니라 히브리어, 코이네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성경이 쓰인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수백번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성경 읽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사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려우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까 더 안 읽게 되고, 안 읽으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니, 한국 개신교가 사회의 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암기도 하고 말씀대로 살았는데, 잘못 읽은 경우입니다. 성경을 안 읽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성경을 잘못 읽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면 성경을 읽고 그대로 살았다는 자부심 때문에 매우 독선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서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때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에 충실하다고 여기게 되는 사태에 이릅니다. 한국 개신교인들 중에는 실제로 성경을 잘못 읽고 그래서 잘못 행동하면서도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비상식적인데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점점 젊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저 같은 사람도 교인이라고 하면 안심되고 반갑기보다도 과연 어떤 종류의 믿음을 지닌 사람일까 하고 의심과 불안부터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캐 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보석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인생의 지혜, 삶과 우주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들에게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골라서 읽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중에는 내게 힘이 되는 말씀도 있지만, 나를 꾸짖는 말씀도 있고, 내게 익숙한 말씀도 있지만 너무나도 낯선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지" 하며 동의할 수도 있지만 어떤 말씀은 내다 버리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제 입맛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듯이, 쓰든 달든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매우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내게 익숙하고 좋은 말들만 뽑아서 읽는 것은 사실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경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일 뿐,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교회가 3년 성경통독을 통해 구약 1회, 신약 2회, 시편 6회를 읽게 하는 것도 성경말씀을 편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성경 전체를 골고루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주의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지금 한국 개신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정말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할 것이 있고, 비유나 은유, 상징으로 읽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은 깊은 영적 해석을 요구합니다. 영적 해석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서신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 성과를 참조해야 합니다. 우리가 호두를 먹을 때 호두껍질을 깨뜨리고, 수박을 먹을 때는 수박 껍질을 벗기듯, 성경말씀 또한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이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란다."라고 하신다면 아이들은 옛날 옛적 이야기구나라고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듣고 정말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게다가 호랑이가 담배를 피운다면 어떤 담배일까를 두고 논쟁을 하고 있고, 파이프 담배인지, 전자 담배인지를 두고 증명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신학으로 알고 있다면 정말 가관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상징과 비유와 은유를 문자 그대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논쟁을 합니다.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하는데 멈춥니다. 심층적 의미가 중요한데, 겉표면에만 머무릅니다. 원수마저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요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수백번 읽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레위기 19장 19절에는 이런 율법 조항이 나옵니다. "밭에다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뿌려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레위기 19장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시면서 들려주시는 계명과 율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들을 문자적으로 읽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21세기인 오늘날 우리는 밭에다 두 종류의 다른 씨앗을 뿌리지 않아야 하고, 두 가지의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은 입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왜 이런 금지조항이 나왔을까를 연구해 보아야 하고, 그 때 그 상황에서 금지한 것들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서 자기 멋대로 마구 적용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혐오를 부추기고 함부로 사람을 이단시하고 죄인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제자를 부르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행했던 첫 사역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회당에 있는 악한 귀신을 내어 쫓으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고 했지만 무엇을 가르쳤는지 내용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면에서 권위가 있었는지 성경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율법학자들의 말씀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만을 보여 줍니다. 가르침의 내용을 말하지는 않지만 가르침 뒤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말씀이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으로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는 마가복음서의 특징에 따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다고 표현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 삶에서 적용되느냐 되지 않느냐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말들이 권위가 있어서 실제로 삶에서 유용하게 쓰일까요? 우리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말들은 어떤 말일까요? 우선 논리적이고 명료하여 사리에 들어맞아야 합니다. 거짓을 늘어놓고 속이려는 말은 조리가 없고 억지를 부립니다. 소리를 질러대고 목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결국은 제 풀에 꺾기고 맙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정확하게 핵심을 말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힘이 있습니다. 그런 언어를 사용하려면 합리적 이성이 있어야 하고, 감정이나 상황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가치나 진리 또한 사람들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고 가슴에 감동을 일으키는 명료한 언어를 필요로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작정 맹목적으로 믿는 습관은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목사들에게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성경 해석방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교인들의 전도와 선교는 늘 비본질적인 것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다른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그것도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의 전도와 선교,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전파가 권위가 있으려면 전해지는 말들이 상식적이고 충분한 설득력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과 행함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고백하듯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셨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악한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명령에 따라 악한 귀신이 물러났는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사람은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고 귀신만 물러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눅 4:35).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방법입니다.
악을 물리치되 악이 행하는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친다면서 자신도 악에 물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깊고 넓은 선과 사랑의 가치로 악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 존재 자체로 어둠을 몰아내듯이, 말만 번드르르 한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 그 자체가 빛이 되는 사람, 말이 곧 행동이고, 행위가 곧 그 사람의 표현인 그런 사람의 말과 가르침은 권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회당에 존재하는 악한 귀신의 모습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필이면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거룩한 예배가 시행되는 신앙공동체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귀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머리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예수님을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악한 귀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 알았다면 자기의 악한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것을 꽉 붙잡고 있으면서 예수가 자기네 일에 간섭하고 자기들을 없앨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악한 귀신에 물들면 이렇게 됩니다. 겉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는 싫고, 예수를 따르다가는 이 세상에서 실패할 것 같고, 그래서 도리어 예수님 말씀이 귀찮고 나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럴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제자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도리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일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회당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매우 중요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건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토론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중심부가 회당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악한 세력들과 싸우고 그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6장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자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임을 자처하면서도 말로만 그러하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을뿐더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적도 일으키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면서도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마태 7:21-23), 주님께서는 더 이상 한국 개신교에 머물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아모스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언자 아모스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야훼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이 축제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고, 빛이라고는 없는 어둠에 휩싸인 날이 된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거짓말하고 탐욕에 물들고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차별하고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의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 예배하는 모습조차도 보기 싫으셨던 것입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오늘 설교제목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설교 제목으로 쓰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베푸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님,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가 주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는 말이 참 신기합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세상이 사랑으로만 가득하고 그래서 서로를 용서하면서 화평하게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과 폭력으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온라인 컴퓨터 게임에 참여해서 욕설을 늘어놓은 이를 강제 퇴장 시키자, 앙심을 품고 게임운영자의 가족을 살해하는 세상입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끊이질 않고,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집주인, 아파트 입주자라는 걸 내세우며 약자에게 온갖 갑질을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더 큰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선량한 중소기업인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기업인이 너무나 억울해서 경찰에 고소합니다. 경찰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늦장 수사를 합니다. 피해자가 따지니까 마지못해 검찰로 넘겼는데, 검찰 또한 대충 수사를 하긴 했는데, 기소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소했더니 이번에는 판사가 한패입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언론에 알렸는데, 기자는 거짓말로 기사를 작성하고 도리어 피해자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공표합니다. 또 각 포털 싸이트는 그 언론사의 기사를 퍼다 나릅니다. 이 기사를 근거로 다시 경찰과 검찰은 이 피해자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합니다. 여러분!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세상이 이렇다면 이 선량한 중소기업인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죄악된 무리들이 한 통속이 되어서 착하고 선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못살게 군다면, 그 거대한 권력자들의 카르텔 속에서 개개인들은 옴짝달싹 할 수 없다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도저히 그 일을 풀 수 없다면, 그래서 계속 피해자가 된다면 누가 이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사람 앞에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다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놈들을 벌하기 위해 복수하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고, 고아들을 살해하면서도 "주가 못 본다, 야곱의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다."라고 비아냥대는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서 우리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어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복수가 원한의 앙갚음으로 계속되는 피의 복수를 불러 오는 것이 아니라 공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고, 정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옳게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일에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삶으로 그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날이 어둠의 날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날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날이 슬픔과 통곡의 날이 아니라 축제와 환희의 날이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빛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빛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하여 주소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 속에서 보석을 발견하며,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하여 주소서. 말씀의 힘으로 욕망을 제어하며 더 깊이 더 넓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제멋대로 사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공의로 다스리게 하소서. 용기를 내어 악한 세력과 맞서 싸우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려는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사랑의 능력을 키워 더 깊이 사랑합시다. 그러나 사랑이 무력해지지 않도록 정의의 힘도 키워 나갑시다. 다시는 이 땅에 악의 세력이 발붙이지 않도록 합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