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간의 자기기만에서 나타난 종교의 모순
이 장에서는 인간의 자기기만에서 나타나는 종교의 모순을 앞선 논의의 순서를 따라 재구성해 '있음'과 '앎' 그리고 '삶'의 차원에서 각각 다룸으로써 신 존재의 모순, 신 인식의 모순, 신앙과 사랑의 모순 등을 짚어보고자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논의의 전개에서 알 수 있듯이 포이어바흐가 지적하는 모순의 총체란 결국 '신의 인간화'라는 미명 아래 신 안에서 인간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인간의 신격화'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인간의 자기 망각'에서 엮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종교의 모순이 신학의 불가해성이라는 이름으로 대강 봉합됨으로써 모순이 해소되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 종교의 모순이 보다 더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 신학의 얼개를 형성하고 있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 구도에서 터져 나온 테트툴리아누스의 이른 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란 명제가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란 신앙고백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의 유효성을 다시금 입증해 줄 뿐이다. 신앙함에 있어서 물음을 터부시, 아니 물음을 아예 비신앙적인 것으로 몰아세워 소위 '묻지마 믿음'을 강요하는 세태가 여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물음이 있기도 전에 터져 나온 기라성 같은 대답들을 던져주며 신앙고백이 아닌 신앙 외우기를 강요하고 있다. 종교의 모순을 지적하며 강도 높게 전개되는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이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이렇듯 물음이 배제된 왜곡된 신앙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의 의심의 해석학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으며 '왜' 믿는지를 물을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는 셈이다. 그의 종교비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의심을 배제하고 확신만을 강조하는 오늘의 종교 이데올로기화 된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을 담보한다는 측면에서 차라리 참된 신앙의 자리 깔기 시도라 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가리켜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반성 수행에 있어서는 시대착오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19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포이어바흐가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전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정당성이 확인된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개화시키고 교양을 보급하는 교육과 계몽, 즉 인간 환경의 변화를 통해 보다 나은 인간 사회를 희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인간 본성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이러한 낭만적 견해에서는 심지어 그가 비판한 종교가 범하는 유토피아적 허위의식 조장의 단면이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이런 보편적인 인간 설정은 포이어바흐의 인간의 유적 개념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관념론을 비판한 그가 여전히 관념론적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대 철학이나 현대 신학에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은 그의 종교비판의 가치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의해 정초된 인간학적 유물론과 휴머니즘이 당대 혼탁한 사변을 정돈된 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했다. 목욕물을 버린다고 아이까지 내버릴 일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포이어바흐와 유사하게 비종교적 상호 인격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현대 신학은 너나 할 것 없이 전통적 종교와 신학에서 인간의 실체 상실에 주목해 신-인 관계의 수평적 대화 시도를 진행하며 대화의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대화의 신학은 신에 의해서만 매개되는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비난하며 인간과 공동인간 간의 수평적 교섭 지평을 옹호한 포이어바흐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감히 평가해 볼 수 있겠다. 포이어바흐의 철학에서 비로소 신-인 관계가 대화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라면 그가 지적한 종교의 모순에 설정된 참되지 않은 신-인 관계를 살피는 것은 현대의 신학을 뿌리에서부터 돌아보는 것으로 새겨볼 수 있겠다.
5.1 '있음'의 차원에서의 신 존재의 모순
5.1.1 '중간물'로서의 신 존재의 모순
먼저 신의 실존과 관련된 '있음'의 차원에서의 신 존재의 모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의 존재 증명에 관해 인간은 다분히 모순적인 입장을 갖는다. 인간은 자기 내적인 것을 외화하고 그것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목적으로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을 전개해 나간다. 때문에 인간은 먼저 자기 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추상화된 신을 정립하나 감성적 동물인 이상 인간은 자신과 같은 감정적 존재로서의 신을 요구하게 된다. 신은 우리를 위한 존재이자 우리의 신앙이나 심정, 본질 속에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존재, 우리 밖에 있는 존재라는 설명이다.
"신은 실존을 통해 물자체(Ding an sich)가 된다. 신은 우리를 위한 존재, 우리의 신앙이나 심정, 본질 속에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존재, 우리의 밖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신은 신앙이나 감정, 사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 느낌, 사유와 구분되는 현실적인 존재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실적인 존재는 감성적인 존재 이외의 어떤 존재도 아니다...(중략)...만일 내가 신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 대하여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어떠한 신도 믿지 않고 또 사유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어떠한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단지 사유되고 믿어질 때만 존재한다."(<기독교의 본질>, 326-327)
따라서 신의 존재는 현실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포이어바흐는 "신의 존재는 감성적 존재와 사유된 존재 사이의 중간물이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중간물이다. 또는 신은 모든 감성적 규정이 결여되어 있는 감성적 존재다. 따라서 신은 비감성적인 감성적 존재며 감성적 개념에 모순되는 존재다"(<기독교의 본질>, 328)라고 말한다.
이러한 신의 실존의 모순은 "인간이 실제로 생각하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것"(<기독교의 본질>, 325)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감성적 요구에 부응하는 신의 대립에서 격하게 표출되기에 이른다. 인간과는 구별된 인간 외적인 속성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인간 외적인 신인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간구를 세심하게 들어주며 인간을 돌보고 품어주는 너무나 인간적인 신이어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앉을 수도 그렇다고 설 수도 없는 신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독교 교의에 있어서 가장 큰 모순이라고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신성의 본질적 술어가 서로 상충되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있음'의 차원에서의 신 존재 모순을 놓고 신학이 불가해성이라는 이름으로 대강 봉합해 신에 대한 본질 탐구 포기를 선언하는 것에 대해 "궤변의 무진장한 보고"(<기독교의 본질>, 346)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인다. 그러면서 신학이 말하는 불가해성의 비밀이라며 아래와 같이 폭로하기까지 한다.
"이미 알려진 특성이 미지의 특성이 되고 자연적인 성질이 초자연적이고 비자연적인 성질이 되어 바로 그것 때문에 신적 본질이 인간적 본질 이외의 본질이고 또 그 때문에 하나의 불가해한 본질이라는 가상(Schein)과 환각(Illusion)이 산출된다."(<기독교의 본질>,346)
포이어바흐에게 신의 불가해성이란 감정으로 충만된 표현의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환상을 종교의 근원적인 기관이며 본질로 파악하는 그는 나아가 신의 본질은 환상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라는 주장까지 펴며 이 환상이란 제한을 갖고 있는 않는 감성, 즉 제한되지 않는 무한한 감성이라는 점도 재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