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역대지상 17장 1-6절, 시편 119편 49-56절, 고린도전서 3장 10-17절
[수요사경회 100회 특집]
지난 주 주일 오후에 수요사경회 100회 특집 촬영이 우리교회에서 있었습니다. 1와 2부로 나눠서 진행했는데, 1부는 한국 교계 내 거짓 뉴스가 생성되고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긴 사단법인 평화나무의 이사장인 김용민 전도사가 초대 손님으로 나왔습니다. 수요사경회가 처음 시작되던 때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평화나무의 활동 속에서 수요사경회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부는 우리교회에서 함께 목회했던 심민정 준목님을 초대 손님으로 "한국교회와 수요사경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했습니다. 촬영 장소가 우리 교회이고, 방청객으로 우리 교인들이 계시니 제가 더 힘을 받았습니다. 원래 제 생각은 매우 가볍고 소소하게 지난 100회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길 바랬는데, 1부는 그렇게 진행되었지만, 2부는 꽤 깊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면서, 저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이자 제가 오래도록 고민해오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1부는 지난 주 수요일에 방송을 했고, 2부는 다음 주 수요일에 방송합니다.
2년 넘는 세월 동안 1시간도 넘는 성서공부 프로그램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1,000여명의 분들이 매주 꾸준히 시청해 주시고 계십니다. 지난 100회의 시간 중 약 90회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여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제가 평생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두고 1년 동안 얍복강 나루의 야곱처럼 몸부림을 한 뒤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그 뒤로 10년 뒤 2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신학의 길에 접어든 저는 4년 내내 2000년 전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던 나사렛 예수님의 실제 삶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로 임직 받은 2008년부터 시무하던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40주 동안 매주 성서공부를 했고,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여러분들과 함께 "청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50강을 진행한 뒤, 다시 한신대 신학대학원생들과 "예수 알기 모임"으로 45강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수요사경회 100회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요사경회 100강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알짬을 두고 예수님과 씨름했던 저의 20년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기초를 놓았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말씀에 100% 동의해야 하고,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목회활동의 중심에 있지 않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두 가지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만나고 깊이 있는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깊이 사귄다면 오늘날 온갖 교회에서 벌어지는 추한 소문들은 들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도무지 예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싶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교인으로 자처하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는 세상의 조롱거리와 골칫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소명의식을 느끼고 신학교로 진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이 너무 좋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은 신학 수업을 통해 고민도 깊어지고, 때로 갈등도 하게 되지만, 올바로 배운다면 일반 신앙인들보다는 훨씬 깊은 신앙의 바다에 다다르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가 우주적 그리스도로 느껴지고, 정답 없는 삶을 헤쳐 나갈 용기도 얻습니다. 그 진한 체험을 가지고 목회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목사후보생들이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뻔히 보이는 고생길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많은 목후생들이 진짜 고민하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진지하게 전하고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이 가득한 교회에서 본질적인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꺼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는 질병의 악순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얼마나 되시나요? 우리가 사는 모습을 초나 분단위로 나눠서 보면 상당수의 시간은 그냥 삽니다. 살아온 대로 별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는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합니다. 매순간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쉽지 않고, 예수님의 길이라고 해도 따르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때에도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라는 교리는 들었고 믿지만 이런 말들이 지니는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라고 하면 정확하게 답변할 수 없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신앙고백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물으면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큰 과제 중에 하나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면서 분열과 상처, 서운함과 분노를 유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가 마가복음서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진정으로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이는 시리아-페니키아 여인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열둘도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은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딸의 생명을 살리고자 했던 이방 여인의 입에서만 "주님"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은 것은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귀신들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떠들지만 자신들을 쫓아낼까 두려워하고, 베드로와 제자들도 눈치를 챘지만 예수의 수난의 길에는 동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고백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 시로-페니키아 여인처럼 때로 모욕도 견디고, 자신의 십자가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러 나서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해 옳게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탐욕에 물든 눈으로 예수의 얼굴을 비틀거나, 교리로 덧칠한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맨 얼굴의 예수를 바라보고 솔직하게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차분히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나서는 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묻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초이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금인가, 은인가, 보석인가, 나무인가, 풀인가, 집인가? 불이 났을 때 안전한 집인가? 아니며 불 속을 헤치고 간신히 빠져 나와야 하는 허술한 집인가?"
어떤 집을 짓느냐는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을 위해 오늘 저는 다시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수요사경회 1-2강과 11강부터 99강까지를 다 들으시고 스스로 깨우치셔야 하지만, 오늘은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친밀하셨던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매우 강하지만 자애로우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세상의 가치들이 뒤집혀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소식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의 선포를 큰 걸림돌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데 그런 자세와 삶 자체가 바로 심판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남녀 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가족들과 집, 직업과 마을을 떠나 예수를 중심으로 형제와 자매가 됩니다. 권력을 쥐고 지배하려는 아버지는 이 공동체에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당시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섭니다. 죄인들로 낙인찍힌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며, 병자들을 직접 만지면서 병을 고쳤습니다. 병을 죄의 형벌로 보는 신념체계를 부정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였습니다. 온갖 악성 피부병이나 다른 병으로 인해 추방된 자들을 치유하시어,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과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도록 하였습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악의 세력, 인간의 삶을 망치고 더럽게 하는 모든 부패한 세력들과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과 두루 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련한 식사 자리에 누구나 오게 하십니다. 특별히 죄인들과 세금 걷는 자, 성 노동자, 모든 면에서 볼 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함께 식사를 하며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침 받고 용서 받은 후에 서로 격려하며 빵을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결코 함께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한 사람들과 밥상을 나누며 새로운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화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해 갑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는 그 사랑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고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남들을 부려 먹으면서 제 배를 불린 사람들, 편안한 삶을 누렸던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핍박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길어야 3년, 혹은 겨우 몇 달간의 공적활동을 하다가 한창 피어나야 할 30대 초반의 나이에 가장 치욕스럽고 잔인한 처형방식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 때 제자와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적대자들은 조롱과 모욕을 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휩싸이지만,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내어 맡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매개물도 필요 없다는 예수님의 생각은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종교권력자들의 눈에 밉보였고, 식민지를 통해 배를 불리던 로마의 권력에 위험한 인물로 비쳤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적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활동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예언자로서 당시의 지배체제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에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국에 반대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입각한 대안적인 사회적 비전을 내 놓았기 때문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의 지배체제는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예언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것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준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절대 타자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삶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 예수입니다.
수요사경회에서 저는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수요사경회 100강 1부 영상에 변형준 님께서 이런 댓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수요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경전으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예수님의 사역과 어우러져 우리들의 현재 삶의 현장에서도 살아서 말씀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변형준 님, Hyung-Jun Byun)
김경진 님은 또 이런 댓글을 달아 주셨습니다.
"언젠가부터 언덕에 나무가 보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청량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더군요. 이제는 수요일 저녁이 기다려지고 온 가족과 지인들과 공유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생명과 평화를 목사님 가르침 속에서 하나하나 깨닫게 됩니다. 귀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샬롬!"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예수님 시대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예수님의 사역과 어우러져 우리들의 현재 삶의 현장에서도 살아서 말씀으로 역사하고,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생명과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저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인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단단한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이 모두는 가능할 것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맹이를 잡으면 됩니다.
41년 전 어제 예수님의 이 알맹이를 붙잡은 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던져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노동의 현장에서 이어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전태일 열사입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을 한없이 아끼고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쳤던 1970년 초에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초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이백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인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전태일 평전 211-212쪽)
그는 한 평범한 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이런 고민을 합니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전태일 평전 209쪽)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무엇부터 생각합니까? 인간의 가치입니까? 새 시대의 희망과 윤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돈지갑의 부피나 통장의 잔액입니까?
전태일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어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율적인 구속을.
그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구를 지적하여 인간상의 표준을 삼을 것인가?
인간의 참 목적인 평화와 희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각한다. 인간은 어딘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존하는 목적의 본질이 희미함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세대. 흐린 탁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자기 자신의 무능한 행위의 결과를 타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나의 또 다른 나들이여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한 영혼의 절규를 외면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심적 더러움을 점고해본 일이 있는가?"
(전태일 평전, 218-219쪽)
오늘 저는 설교를 하면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오늘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구를 지적하여 인간상의 표준을 삼을 것인가? 나는 오늘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인간인가?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의 더러움을 점검하는가? 한 영혼의 절규를 듣고 있는가?"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에, 조직이나 제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인간상의 표준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우리 모두는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도전도 되고, 위로도 되고 희망도 되길 빕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희망을 삼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려 주고, 고난을 받을 때 큰 위로가 됩니다. 교만한 자들이 우리를 조롱하여도 주님의 법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악인들이 주님의 율법을 무시할 때 거룩한 분노를 지니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율례를 우리들의 노래로 삼아,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누리게 하여 주소서. 우리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1월을 보내며 올 한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새로운 예배 공간을 허락하시고 1년을 보냈습니다. 일상의 회복을 꿈꾸는 때에 다시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명심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거룩한 성전이 되어 하나님을 모시고 날마다 성령의 길을 걸어가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