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CK <사건과 신학> 12월호는 조동연 논란을 다뤘다. 조동연 논란을 통해 대중이란 집단의 힘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정치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글들이 게재됐다. 그 중 송진순 NCCK 신학위원(이화여자대학교)은 '깨어져 열릴 이들을 바라며'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송 위원은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에서 인용한 아래의 문구로 글을 시작했다. "정치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함께 부여하는 행위로서, 심층적으로는 하나의 인간적인 기획이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진 게(broken apart) 아니라 깨어져 열린(broken open)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을 이룬다면,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위해 차이를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힘을 용기있게 사용할 수 있다."
송 위원은 조동연이 실무경험이 있거나 정무적 능력이 있는 인물로서 당에 영입된 인물이 아닌 철저히 정치적 상징성을 띤 인물로 외부에서 당이 영입했던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조동연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은 우주한공전문가, 육사 출신 군인, 30대 워킹맘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당의 기대와는 달리 조동연 사생활 의혹이 불거지면서 조동연은 삼일만에 사퇴 의사를 밝히고 당은 재빠르게 손절하면서 사건을 수습한다. 이를 두고 송 위원은 "당이 내세운 여성, 엄마, 군인, 전문가라는 다층의 정체성은 불리한 상황에서 가장 고약하고 골치 아픈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정당의 인사 검증 실패를 지적하기 전에 정치권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단박에 드러난 것이다. 인간은 상징과 전시의 도구가 아닌데 말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동연 사생활 의혹을 둘러싼 대중의 지나친 관심이 불러온 한 개인에 대한 무참한 폭력에 대해 고발했다. 그는 "클릭 수에 경제적 이득을 위해 경합하듯 달려드는 유튜버들이나, 국민의 알 권리를 핑계로 대중의 말초적 호기심을 끌어내 파헤친 언론이나 천박한 것은 매한가지이다"며 "무한 반복되는 보도 기사에 정당성과 객관성을 따지기 전에 저급한 댓글 잔치는 우리 사회가 이토록 윤리적이었는가(?)를 실감하게 했다. 굳건한 정상 가족의 신화와 고결한 사생활 의무에 대한 강조는 물론이고, 한 가정의 히스토리를 낱낱이 퍼나르는 미디어와 대중의 행태에 작금 우리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를 알 만큼 너무나 살가운 공동체구나라는 생각에 실소를 머금게 했다. 정치든 언론이든 대중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중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지적했다. 송 위원은 "그녀에게 쏟아진 이혼 사유에는 잔인하도록 가혹하면서도, 군대라는 권위 조직에서 불거진 성폭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넘어가기에 바쁘니 말이다. 최근 군대에서 일어난 성희롱, 성폭력 사건들이 오버랩되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라며 "정작 비판하고 개혁해야 할 곳에는 침묵하고, 보다 중요한 일을 향해 사건은 사건으로 덮고 개인사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관대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낙인찍기는 대중의 몫이고, 그 결과는 개인의 몫인 셈이다"고 했다.
송 위원은 이어 "정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자 힘이다. 예수의 삶이 깨어져 부서진 듯해도, 실패한 운동으로 사그라지지 않고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그의 마음, 다시 말해 사람들의 비통한 마음을 끌어안고 다양한 차이에 귀 기울였던 그의 태도에 있었다"며 "그것이 파커 파머가 말한 깨어졌으나 새롭게 열어가는 가능성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인을 빌미로 예수를 고발하려 했던 바리새인에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 8:7)는 예수의 요청은 여인을 도구삼아 타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몰려온 이들의 마음에 틈을 냈다. 그들 역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 속에서 비통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인과 마주했다.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리고 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고 전했다.
안정적 기반에 공유된 도덕의 틀에 따른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부할 것도 제안했다. 송 위원은 "모든 이들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기존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부단히 자기 자신을 넘어 가치를 생성해가는 존재는 아니다"라며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퍼진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 내면의 분노와 공허함을 집단적으로 분출하기보다는 서로에 비통한 마음을 살펴보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판단을 유보하고 타인에게 겨눈 잔인한 무기들을 내려두고 서로의 부서진 마음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를 인정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다음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