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42장 5-9절, 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7-18절
[오미크론 확산과 설 주일]
다음 주 화요일 2월 1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설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작년 설 주일에도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올해도 영상으로만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전파력이 무척 강하고 치명률은 다소 약화된 오미크론에 의한 코로나 확산은 이전에 겪지 못한 또 다른 현상입니다. 그래서 방역 당국도 이전과는 다른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오미크론을 코로나 19가 아니라 코로나 21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난 1월 20일은 우리나라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처음으로 발생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2년의 세월 동안 실로 많은 것이 변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변해갈 것입니다. 오미크론이 실제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어 코로나의 마지막 발악이 될 지, 아니면 앞으로도 또 어떤 바이러스 변이가 발생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설날'이라는 말 자체가 어원을 살펴보면 낯설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여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설 주일을 맞는 우리는 코로나 19의 새로운 변화에 더욱 더 조심하면서 기민하게 대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설날을 맞이하며 행하는 우리 민속에 '야광귀 쫓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광이라는 귀신은 밤에 사람 사는 집에 몰래 들어와 툇돌에 놓인 여러 신들을 신어보고 자신의 발에 맞으면 훔쳐 가기를 좋아합니다. 이 때 잃어버린 신의 주인은 한 해 동안 운세가 불길하여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섣달그믐날 밤에 사람들은 귀신이 신발을 신어보지 못하도록 신발을 방 안에 감춰 두거나 엎어 놓기도 하며, 체나 키를 마루 벽이나 대문 등에 걸어 두기도 합니다. 체를 걸어 두는 이유는 체의 구멍 세는 것을 좋아하는 야광귀가 체 구멍을 세다가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또 세다가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그냥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체나 키를 대문에 걸어 두는 것은 체나 키에 있는 구멍들 때문입니다. 이 구멍들을 눈으로 생각하고, 낯선 새해를 맞이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위험과 위협을 피해가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설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또한 체의 눈처럼 다양하게 많은 여러 눈으로 세상을 살피어서 어떤 위험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맞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목회활동과 선교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2년을 돌아보며]
코로나와 함께 한 2년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코로나의 성격을 파악해야 하는데, 첫째로 코로나로 인해서 전 지구적으로 위험이 닥쳤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합니다.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 벌어지는 중이고, 지금 예배를 녹화하는 금요일 이 시간에 전 세계는 확진자가 3억6천6백만이 넘고, 사망자는 565만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전 세계적으로 나온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이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따라서 지치고 힘들더라도 계속해서 조심해야 하고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됩니다.
두 번째 코로나 상황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습니다. 이 변화의 물결은 역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코로나 19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이 봉건 질서를 무너트리고 근대 세계를 열었듯이, 코로나는 기후 붕괴를 불러 온 인간 중심의 문명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인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제가 엊그제 도서관에서 <동물과의 대화>라는 책을 빌려 왔는데,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1500만이 넘는 시대에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존중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에 매우 좋은 책입니다. 지난 천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외쳐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못지 않게 공동체의 안전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나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남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와 함께 사는 인간은 공동체를 배려하는 자유로운 개인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개인은 오고 있는 세상에서 도태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안전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유능한 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이제 40일만 지나면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빠릿빠릿하게 일 잘하는 정부를 운영할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경제 부분에 있어서는 시장의 질서에 맡기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하여 국민의 삶을 돕는 케인즈주의로 선회해야 합니다. 모든 기업은 이제 돈만 생각해서는 오히려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한 ESG 경영, 즉 자연환경과 공정한 사회, 기업 내부의 평등한 협력 구조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무조건 성장하려는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성체(成體)가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듯이, 자본주의의 욕망은 반드시 조절되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시점에서 자족할 줄 알고,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과 나누는 공유경제를 지향하는 경영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빨리 온라인 비대면 사회, 언택트 사회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직접 만나서 하는 모임과 행사, 활동은 매우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온라인 상에서 만나고 활동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또 활용해야 합니다. 초고령화 사회와 1인 가구의 급증, 직접 대면의 축소는 사람들을 외로움의 늪으로 빠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홀로 있을 때 외롭지 않고 고독을 즐길 줄 아는 능력 또한 요청됩니다. 외로움이 우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적 성찰로 이어지도록, 그리스도교의 침묵 기도 전통과 불교의 명상과 선 수행 같은 훈련에서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이 우선시 되면서 만남 또한 선택적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갈수록 아무나 만나지 않고 꼭 필요한 만남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안전한 만남이 되기 위해 우선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아남는 종교 공동체는 좋은 성품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언제든 지금의 위험과 어려움이 증폭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이러스 창궐에 의한 글로벌 위험사회의 도래는 언제든 경제적 파국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더 힘들어집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양극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것을 조절하는 화해와 협상, 타협, 갈등의 전환 능력이 무척이나 요청될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잠시 멈추는 것도 좋습니다. 섣불리 나서면 안 됩니다. 위험의 순간이 매우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기회인지 무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멈춰야하는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과 행동은 실로 위험을 가중시키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합니다.
지난 2년 우리 사회의 코로나 상황을 살펴보면 몇 가지 지점에서 집단 감염과 확산의 고리가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천지 발 사태와 광화문 집회처럼 종교인들의 잘못된 판단과 기존 예배 형식에 대한 비상식적이고 고집스런 집착이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둘째는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자신들이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음에도 집회의 허락과 방역 패스의 문제에 있어서 오판을 내림으로써 국민 전체를 더 깊은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셋째는 언론입니다. 백신 도입과 접종, 방역의 대책과 진행에 있어서 메이저 언론들은 정직한 보도를 하기보다는 현 정부의 흠을 잡기 위한 왜곡된 보도를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행동들이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고, 놀라운 K 방역의 성과에도 여전히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욕심을 부리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들 때문에 코로나는 중요한 순간에 더 확산되었고,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시민에게 닥쳤습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장애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두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2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스트레스도 받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고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 대한 비난, 남 탓, 낙인찍기, 불평과 불만, 정제되지 않는 감정의 배설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방식을 택하고야 맙니다. 왜일까요?
[선한 목자를 만나라]
그것은 참된 지도자, 선한 목자,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문으로 정당하게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담을 넘어 들어오는 도둑과 강도를 언급하시면서 삯군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도둑과 강도는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러 오는데, 목자의 탈을 쓴 삯꾼들이 강도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양들을 알고, 자기 양들을 먹이며,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는 참되고 선한 목자와 달리 삯꾼 목자들은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양들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양들을 생각하지 않아 이리떼가 몰려 올 때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도록 우리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바른 정책으로 국민을 이끌기보다 힘으로 내리누르려는 군사 정권에 시달렸습니다. 잘 살게 해 주겠다는 허언(虛言)에 속았고, 국가를 자신의 수익 모델로 삼았던 수많은 정치인들을 보아 왔습니다. 국민이 맡긴 신성한 책무를 아무에게나 맡겨 버린 황당한 일도 겪었습니다. 치밀한 취재와 탐사 보도 대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실조차 왜곡하는 기레기들을 보아 왔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공정한 법 집행보다 권력에 기웃거리며 제 입맛대로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는 법조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모험과 창업정신으로 회사를 참되게 운영하는 기업가 대신 하청 업체를 쥐어짜서 자기배를 채우는 재벌들의 못된 행태들을 주로 봐 왔습니다. 참되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따르는 신자들보다 경건한 체 하지만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숱한 교인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이들과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쌓여 갔습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 도둑이요 강도들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세상은 숱하게 많은 지식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을 찾기도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오랜 시절 예수와 야훼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랐습니다. 실로 우리의 주님, 하나님은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시편 23편은 이 사실을 매우 아름다운 노래로 세상에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이 노래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목자와 양을 생각하면 푸른 들판에 매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립니다. 마음씨 좋고 잘 생긴 멋진 목동이 어린 양에게 풀을 먹이는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유목민이 양을 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이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이스라엘에는 푸른 초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다는 황무지와 광야입니다. 일년에 푸른 풀이 돋아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11월부터 2월의 우기 이후에 3개월 정도입니다. 6개월 동안의 건기에는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립니다. 비가 오고 풀이 나기 시작해서 자라면 이제 목자들의 삶을 바빠집니다. 풀이 많이 자라는 곳을 계속 찾아다녀야 합니다. 한낮에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주위에서 하루일과를 계획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이라면 시원한 언덕 경사지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양들이 풀을 뜯고 쉬면서 안전하게 소화시킬 장소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이 살던 헤브론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양을 치러 갔던 도단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km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자들은 풀을 찾아 다니며 광야를 지나야 했고, 길바닥에서 숱하게 자야 했습니다. 동굴이라도 발견하면 그나마 아늑한 잠을 잘 수 있지만, 길 위에서 돌을 베고 자는 일들이 일상이었습니다. 모래 먼지 가득하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광야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움의 연속입니다. 사나운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양을 지키기 위해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생사를 건 결투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 그림에서 보는 하얀 양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양털 사이로 먼지가 켜켜이 쌓여 황토색이 되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세차게 흐르는 물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목자들이 물길을 틀어 웅덩이를 만들어서 물을 고이게 하거나, 물살을 막아 잔잔하게 흐르게 해야 마십니다. 또 광야에서 길을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광야 이곳저곳을 헤매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얽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양이나 바위 밑에 떨어져 다리를 다친 양들을 구하고 어깨에 매고 와야 합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이렇게 힘들고 고단하고 더럽고 거칠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피하는 직업었을 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랍비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이런 목자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목자는 세리, 창녀, 어부들처럼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겨 배척하던 직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런 목자와 동일시 한 것 자체가 바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고된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목자로서 실패한 일곱가지를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고,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않았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길 잃은 자를 찾지 않았으며, 양들을 힘으로 통치하고 폭력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길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힘들고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우리에 있지 않는 다른 양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선한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올 한해 코로나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지도자가 계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의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올 한해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 갑시다. 주님은 뒤에서 회초리로 우리를 몰아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차분히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위협이 닥치고 위기가 온다 하여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고, 우리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무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며, 욕망의 어둔 영창에 갇힌 이들을 끌어 내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선한 목자를 따를 때에 그 누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날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가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에 우리는 모든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를 떨쳐 버립니다. 올해도 우리는 주님께서 차려 주신 잔칫상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영원히 주님 머무시는 곳에서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며 모든 억압과 두려움 속에서 자유를 주는 이들이 되겠습니다. 올 한 해에도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도 주님의 은총을 누렸사오니 올 한 해도 감사가 넘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주님 올 한해,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길 원합니다. 코로나 19의 상황이지만 지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게 하여 주소서. 동시에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도 힘쓰게 하여 주소서. 어둠 속에 감춰진 빛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힘 있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언제나 넘치는 기쁨의 잔을 드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선한 목자를 따르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