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박사(한신대 신학대학원 초빙교수)가 최근 서울 수유리 소재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열린 명사특강 강사로 나서 '"때문에"와 "위하여"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정 박사는 "고통 자체 보다 고통에 대한 오해 때문에 고통이 가중되는 측면이 많다"며 고통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겪는 고통을 적실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이 던지는 공통 질문인 "왜"라는 물음을 주목하며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추려지는 "때문에"와 "위하여"가 갖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살펴봤다.
그에 따르면 고통의 뿌리를 추적하며 원인을 규명하려는 "때문에"는 대책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합리화시켜 고통을 경감시키는 순기능을 했다. 특히 기독교에서 죄와 벌이라는 인과율로 풀이되는 '때문에'는 권선징악의 윤리적 요소도 내포하고 있어서 체제의 유지와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부조리와 모순 투성이인 삶에서 이러한 "때문에"의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절규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랬고 전도사 기자가 그랬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 당하고 악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일이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때문에"에 대한 신봉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그렇지만 이 "때문에' 대한 신봉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정 박사는 "절규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리적 고통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사야 53장 4-5절 말씀을 인용한 그는 ""때문에"가 안 지켜지는 것을 설명하려니까 확장을 시켰다. 죄 지은 놈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의인이 대신 벌을 받는다. 대리적 고통이다. 이게 더 발전해서 신약으로 넘어 와서 대속적 고통으로 나아간 것이다"라고 밝혔다. 대리를 거쳐서 대속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정 박사는 이러한 대속적 고통관이 "기독교의 포기할 수 없는 핵심 복음으로 등장했다"며 "이 모두 다 사실은 "때문에"였다. "때문에"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이다. 다만 죄졌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공식이 안지켜지니까 죄인에 대한 벌을 의인이 받는다. 대리, 대신 받는다. 심지어 그 대신은 그 분일 경우 성육신 대신 그 사건이 대리를 하게 되면 대속의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철저히 "때문에"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때문에"가 집요하게 대리를 거쳐서 대속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고수되었을까"라고 반문하며 삶의 불안과 안정 추구를 위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삶은 예측불가한데 원인과 결과의 틀에 집어 넣게 되면 콩 심었으니 콩, 팥 심었으니 팥. 예상할 수 있게 되면 예측 불가에 의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때문에"가 원인과 결과 사이를 이어주는 인과율이 그렇게 철저하게 신봉되었던 것이다. 동양 종교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도 그렇고 유대교 경전을 기독교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 전통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비중을 아직도 차지하고 우리를 강박적으로 짓누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거기서 더 나아가서 죄 지으면 벌 받는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자. 권선징악의 윤리. 그래서 어떻게 세상 체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로까지 작동하도록 "때문에"가 고수되어 왔다. 그래서 계속 지금도 떠받쳐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때문에"가 초래하는 역기능이 있었다. 정 박사는 "과도한 죄의식을 일으켜서 결국은 이제 저주와 자조에 이를 수 밖에 없게 되겠고 인간은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인과율인데 벗어날 수가 없다. 숙명적인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신은 그 인과를 철저하게 집행하는 공포스러운 폭군으로 군림한다. 죄 지었으면 벌을 줘야 하고 아귀가 안맞으면 대신 붙잡아서 벌을 준다. 이렇게라도 가야 한다. 대리적 고통인가? 심지어는 그래서 대속까지 간다. 신은 그걸 집행하는 공포스러운 폭군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니체는 "아픈 사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을 그건 죄에 대해서 벌 받는 거야. 나쁜 사람이다.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종교가 오염시켰다. 엄연히 자연현상인 뿐인 것을 종교와 도덕과 문화가 그렇게 왜곡, 오염시켰다고라고 열심히 비판한 것이다"라고도 했다.
한편 "위하여"는 고통이라는 나쁜 수단이 좋은 목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며 고통을 위로하는 순기능을 함으로써 "때문에"가 내포한 정죄와 저주의 고리를 끊어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으로 기만으로 전락하는 역기능을 내포했기에 역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정 박사의 설명이다. "위하여"의 기만에 대해 그는 "'못 가진 자'의 고통을 미화해 고통을 견디도록 마취했으며 내세적 보상 기대를 통해 무책임한 희망을 살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때문에"와 "위하여"를 넘어서는 고통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그는 "더불어"의 윤리를 제안했다. 정 박사는 ""더불어"의 윤리는 남에게 정죄, 보장 없이 위로하지 않고 나에게 그것을 끝없이 죄의식이나 강박이나 또는 허상의 좋은 일이 있을거야라고 자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