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4:3-7, 요한1서 3:11-18, 요한복음 2:7
설교문
초기 기독교의 모든 가정에는 세 가지 물품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양초와 담요 그리고 마른 빵입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릴지 모르니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양초가 있어야 했습니다. 나그네가 굶주렸을 테니 신속히 마른 빵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잘 때 덮을 수 있는 담요가 필요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초기 기독교 모든 가정의 필수품입니다. '나눔과 환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려주는 표지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나눔과 환대는 '감사의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감사의 신앙을 나눔의 실천으로 나타내라 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디모데전서 6:11, 17-19)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15-16) 선을 행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예배)입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 드렸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교회 강단에서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받으시고, 아벨은 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으셨다.' 다시 말해 제물(祭物)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은 피 없는 제사는 안 받으신다며, 결국은 예배와 헌금을 결부시킵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은 제물을 가지고 맘에 안 든다고 탓하시는 분일까요?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서 자기가 바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7)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가인의 '제물'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은 가인의 '삶'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인의 제사(예배)는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제사(예배)였고, 반대로 아벨의 제사(예배)는 삶이 뒷받침된 제사(예배)였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선하고 의로운 삶인지 알고 싶어하십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한1서 3:12)
하나님은 삶이 빠진 제사(예배), 삶이 빠진 제물(헌금)을 하나님은 심지어 가증이 여기신다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그걸 줄기차게 강조합니다. 이사야 1:13-15입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아모스 5:21-24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혹 예배(제사)를 드리러 온 "[우리]의 손에 피가 가득"합니까? 과연 내 삶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삶입니까? 가인처럼 하지 말라고 당부한 요한1서의 저자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7-18) 가인은 말과 혀로만 예배(제사)했습니다. 행함과 진실로 제사(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그런 식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언제나 실천입니다.
고(故) 장영희 선생의 에세이 "못 줄 이유"는 유머와 풍자를 담고 있는 한 편의 콩트 같은 글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 미사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솔직히 "평상시에는 그저 [자기] 편리한 대로 살다가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는, 참으로 한심한 신자"라고 스스로 소개합니다. 어느 날 미사에 갔는데, 강론하시는 신부님이 성서 속에서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시다가 갑자기 무엇이든 좋으니 옆에 앉은 사람과 그걸 나누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나눌 물건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몸으로 갔던 장영희 선생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주머리를 뒤져 봐도 자동차 키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차 키를 준다? 하, 말도 안 되지. 그럼 뭐가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내 몸뚱이에 걸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에 맨 스카프? 백 퍼센트 실크니 아마 2, 3만 원은 할걸. 귀고리로 말하자면 금이 아닌가, 금. 한 돈쯤 된다 쳐도 5만 원은 할 것이다. 목걸이는 아마 그보다 더 비싸겠지? 대충 6, 7만 원? / 평상시, 숫자라면 백치에 가깝도록 무능한 나의 두뇌가 '못 줄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놀랍게도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내가 지닌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실반지, 이것은 가격으로야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학생들이 해준 선물이다. 못 주지, 암, 못 주고말고. 그럼 재킷? 낡긴 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고 이맘때쯤이면 교복처럼 입는 옷이니 그것도 줄 수 없다. 그럼, 거기에 꽂힌 브로치? 하지만 세트로 된 것이라 하나를 줘 버리면 나머지는 짝짝이가 될 터라 그것도 못 주겠고...... / 옆에 앉으신 할머니는 이미 무엇인가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어쩌나, 어쩔거나. 그런데 무심히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 다행히, 너무나도 다행히, 며칠 전 음식점에서 입가심으로 준 박하사탕 하나가 잡혔다. 원래 박하사탕을 싫어하기 때문에 먹지 않고, 그나마 버리는 수고가 아까워 그냥 넣어 두었던 물건이었다. / '주님, 감사합니다!' /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내게 필요 없는 물건, 아니 오히려 주어 버려서 속 시원한 물건을 발견하게 해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탕을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도 무언인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는데, 그것은 아주 조그맣고 예쁜 병에 든 '구심'(救心)이라는 심장약이었다."
눈앞에 장면이 영화처럼 지나갑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이제 장영희 선생의 회개와 성찰이 시작됩니다 "신부님은 '작은 물건이라도 옆 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어떠냐'고 물었다. 과연 사람들의 얼굴들이 환한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미소를 담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내가 신심(信心)은 좀 부족해도 그런대로 하느님의 뜻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선하고 올곧게 살아간다고 믿었다. 아니, 어떤 때는 오히려 선하기 때문에 손해 보며 산다고 억울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구차한 자기 합리화였다. / 옆에 앉은 할머니의 행색이 옹색해 보여서, 날씨가 추운데 할머니 재킷이 내 것보다 얇아 보여서, '구심'을 내어놓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서 등 '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는데도,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못 줄 이유'를 찾는 것은 아마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다져 온 나의 마음가짐 탓일 것이다. /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보다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보다는 '좋아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건 채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 / 나는 '구심' 병을 손에 꼭 쥐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 '주님, 제 육체 속의 심장은 멀쩡히 뛰고 있지만 제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제 마음을 고쳐 주소서. 저에게 구심(救心)의 은총을 베푸시어 희고 깨끗한 마음을 주소서.'"(장영희 에세이, 『 내 생에 한 한번』 중에서.)
우리에게도 이런 '구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구원하는 기도 말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떼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내 안의 욕심을 비워야 비로소 나눔이 채워질 공간이 생깁니다. 내 안이 비워진 만큼 여백이 생기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 은혜가 나눔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오늘의 복음서 이야기(요한복음 2:1-11)는 바로 그 비움의 이야기입니다. 비움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렸고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당부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항아리 아귀까지 물을 채우니 그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포도주가 되었던지 사람들은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칭찬했습니다. 가나의 포도주 사건은 예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항아리는 아가리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의 한 가지입니다. 숨을 쉬는 질그릇인 항아리는 웬지 그 생긴 모양이 사람을 닮았습니다. 그런 항아리를 보고 김민수 목사가 이렇게 성찰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면 비어있어야 한다. / 기적은 비움으로부터 오는 것, / 채우려 살지 말고 비우며 살아가야, / 물을 채울 수 있고, / 비로소 그 물은 포도주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서는 것 / 항아리에 채워진 물은 특별한 물이 아니라, / 일상에서 식수로 사용하는 그 물, / 특별한 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면 기적이 아닐 것이니, / 맹숭맹숭한 물이 포도주가 되었으므로 기적인 것이다. / 주어진 하루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나의 항아리를 비우는 일. / 미움을 비워야 비로소 사랑이 채워질 공간이 생기고, / 다툼을 버려야 비로소 평화가 자리할 공간이 생기고, / 욕심을 비워야 비로소 나눔이 채워질 공간이 생긴다."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2022 창조절 묵상집」 중에서.)
나의 항아리를 비워야 합니다. 그 비움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주어진 하루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나의 항아리를 비우는 일"입니다. 주어진 하루는 특별한 물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식수로 사용하는 물, 맹숭맹숭한 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풍성한 생명을 여는 열쇠입니다. / [이런]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합니다. / 부정을 수용으로 바꾸고, 혼돈을 질서로, / 혼란을 명쾌함으로 돌려세웁니다. / 한 끼 식사를 풍족한 잔치로, / 평범한 집을 오순도순 정이 흐르는 가정으로, / 나그네를 친구로 바꿉니다."(멜리디 비티, <감사로 채워라>) 누구의 삶에든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 복을 세어 보십시오.(Count your blessing!) '나에겐 왜 이렇게 부족한 게 많을까' 하는 결핍의식은 사람을 감사를 모르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항상 빈곤합니다. 하지만 감사할 줄 알면 항상 풍요롭습니다. 작은 일에 감사를 못 느끼면 큰일에서도 감사를 못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예쁜 구석을 자꾸 찾아낼 수 있듯이 감사도 그렇습니다. 내 삶의 예쁜 구석을 잘 찾아보면 감사가 넘칩니다.
"세상을 산다는 게 문득 외로워져 / 집을 나와 겨울거리를 걸어보니 / 차가운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 그동안 나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 두터운 외투에게 고맙고 / 외투가 없으면 춥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 내 몸에게도 고맙다 // 사랑에 실패한 후 /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 이별에게도 고맙고, / 쓰린 이별 덕분에 /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 아직도 내 머리 위에서 /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서 있는 / 푸른 하늘에게도 고맙다 //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 문득 흐려져,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느끼며 / 인생을 산다는 건 / 행복하다가도, 문득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 몸소 알려준 하늘에게 / 다시 또 고맙고 / 그걸 느낄 수 있게 /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신 / 하나님께도 감사한다 // 고맙다 고맙다 / 다 고맙다 / 이 세상은 고마운 것투성이다."(김종원,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감사와 나눔',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표지입니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마태 20:28, 마가 10:45) 그리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가난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우리의 기도 속에 과연 예수께서 임하실요? 하늘을 향해 떼쓰는 통성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실까요? 예수님은 한 번도 그런 기도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어디에서 '나' 하나만을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67편도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 25:40)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함이 곧 예수를 사랑함입니다. 그 둘이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몸으로 행하는 기도'입니다. 낮은 이웃을 섬기는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그리드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만나는 어려운 이웃은 '주님께로 가는 관문'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는 일은 '거룩한 의무'입니다. 이 열매가 없으면 '신앙의 기쁨'도 없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 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주님을 닮아 거룩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헌신하면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잠언 3:27) 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드리는 이곳이 너무 좋아서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주님은] 날 가라 명하[십니다]."(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예배(제사)와 삶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눔이 없는 제사(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15-16)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십시오. 날마다 감사와 나눔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나의 항아리를 매일매일 감사의 물로 채우십시오. 주님께서 그 일상의 물을 진하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바꾸어주실 겁니다. 그래서 혼례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은혜와 행복을 느끼는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실 겁니다. 이 기적이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