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종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흔히 '무소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만이라도 물질은 필요하기에, 교회가 소유로부터 아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양명수 교수가 '한국 기독교의 특징에 관한 신학적, 철학적 고찰' 논문에서 '소유가 주는 자유'를 한국 교회와 연관지어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소유가 주는 자유'와 친숙하다. 그는 "기독교는 종교치고는 무소유보다는 소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에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는 예로 유대민족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든다. 유대교 영성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경험'이었다.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은, 모든 것이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가 드디어 자신의 것을 주체적으로 가질 수 있는 상태로의 해방으로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물질 세계를 긍정한다. 예수에 대하여서도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해석하였고, 사도신경은 "육신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의 논쟁에서 물질은 악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이 악'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창조 후 '보기에 좋았노라'고 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종교"라고 양명수 교수는 설명했다.
서양 문명도 '소유가 주는 자유'를 중시한 문명이다. 양명수 교수는 헤겔과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든다. 그에 따르면 헤겔의 《법철학》이 제시한 인류 자유의 세 단계 중 첫 단계인 추상법의 단계는 소유와 관련된 것이다. "헤겔이 소유를 첫 번째 자유의 단계로 삼았다는 것은 물질에 대한 지배를 중요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소유물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자유가 소유물을 통해 실현된다는 시각이다.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도 재산권 문제가 핵심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정신적 자유를 누리기 전에 물질 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에, 서양 문명에서 소유는 "자유를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이기 이전에, 자유의 기초"이다.
이와 같이, 물질에 대하여 긍정적인 그리스도교, 소유가 주는 자유를 긍정하는 서양 문명의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다. 기독교가 전파될 초창기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한국교회는 서양의 자본주의를 잘 흡수했고, 자본주의적인 한국 기독교는 민중에게 어떤 면에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을 수 있다. 만약 이때 기독교가 '무소유를 통한 자유'를 강조했다면 기독교는 이처럼 빠른 부흥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소유는 마치 성리학처럼 "자기 수양의 원리로서는 좋지만 민중의 삶을 후덕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양명수 교수는 "한국 기독교가 갑자기 부흥한 것은 기독교가 물질을 긍정하는 등 그 영성에 그런 민중의 삶을 구원할 원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리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이제는 굳이 교회가 소유를 말하지 않아도 소유가 넘치는 경쟁력 높은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계속 '소유가 주는 자유'를 말할 것인가? 풍족한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교회의 메시지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물질에 대한 긍정'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관심'은 '세속주의'와 복잡하게 얽혀 어지러운 모양새이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세대는 직관적인 답을 얻기 힘들고, 교회 메시지는 이들에게 의미 있게 읽히지 않는다.
양명수 교수는 "종교는 무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온 세상이 경제 논리로 돌아가고 과소비가 구조적으로 조장되는 세상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소유의 공간을 마련하는데 있다." 그래야 교회가 소유를 위한 경쟁에서 지친 영혼들이 안식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될 수 있고, 소유가 아닌 '근원적인 생명'을 가리킬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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