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습관에 따라"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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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6:4-9, 에베소서 4:21-24, 누가복음 2:41-52

설교문

예수님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그분이 서른 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한 3년의 공생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행히 오늘의 복음서 본문(누가복음 2:41-52)에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일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년 시절을 전하는 유일하고 참 귀한 말씀입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41-42절)라고 이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해마다",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 했습니다. 여기서 "관례를 따라"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에토스'를 저는 "습관에 따라"로 번역해보았습니다. 관례(慣禮)란 '예로부터 굳어져 계속 전해 온 사례나 관습'을 가리킵니다. 습관(習慣)은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몸에 익은 개인적 행동'을 말합니다. 전자는 남들이 정한 걸 수동적으로 따르는 의미가 있지만, 후자는 능동적인 참여가 강조됩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모든 유대인 남자는 적어도 1년에 세 번, 그러니까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의 부모는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후 12년 동안 예수님의 가족은 "해마다", "습관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겁니다. 같은 누가복음의 2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태어나신 지 8일째에 할례를 받았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예수님의 할례 기사를 보면 그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이를 행했다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누가 2:22, 23, 24, 27, 39절) 예수께서 "율법에 따라", "습관에 따라"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셨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요람에서 배운 것이 무덤까지 간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고, 그 습관을 따라 자라게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살이 되던 유월절에 "습관에 따라"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부모 일행과 함께 귀가하지 않고 성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46절)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곧 율법교사들 한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질문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7절) 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교사들은 12살짜리 소년 예수가 통찰력 있게 자기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자기들의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아들을 잃어버린 줄 알고 망연자실하여 여기저기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 마리아에게 소년 예수는 왜 자신이 당연히 있을 장소를 알지 못했느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들 잃어버린 줄 알고 혼이 나간 어머니에게 하기에는 좀 냉정한 말 같습니다. (누가 2:49) 여기서 "내 아버지 집에"는 헬라어로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입니다. 직역하면 '나의 아버지의 사람들 가운데'입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고 계셨던 맥락을 고려하면 '나의 아버지의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이 당연히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음을 어머니가 몰랐느냐고 대꾸하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 동안 종종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셨을 겁니다. 그 기간에 아들 예수가 보이지 않을 때 부모가 찾으면 그는 어김없이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고 있었을 겁니다. 소년 예수는 나사렛에 계실 때에도 주변 율법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셨을 겁니다. 거기서도 부모는 아들이 보이지 않을 때 회당에 가면 율법을 토론하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사랑하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이러한 아들의 특징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들이 보이지 않을 때 당연히 율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성전으로 왔어야 했습니다. 요즘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가 있나요?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나요?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찾을 수 있는 곳은 회당이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아들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만드는 건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옮겨보자면, "You are what you love"쯤 되겠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를 만듭니다. 사랑하면 좋아하기에 시키지 않아도 자꾸 되풀이하여 내 몸에 붙은 행동이 됩니다. 곧 습관이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곧 습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습관이 나를 만듭니다. 좋은 습관이 훌륭한 존재를 만듭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성전에 남아 율법학자들과 토론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습관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교육 방법 가운데 '하브루타'라는 게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친구를 뜻하는 '하베르'에서 유래했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토론식 교육법입니다. 나이와 성별에 차이를 두지 않고 둘씩 짝을 지어 논쟁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공부라기보다는 토론 놀이에 가깝습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건 아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 있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직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하브루타 과정에서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이 길러집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다양한 시각과 견해를 알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격언에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의견이 나온다"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하브루타는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는 토론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한 토론이기에 승자가 아니라 진리가 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아이가 '유니크'(unique)한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서로 다른 '달란트'(재능)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의 목표는 그 아이가 '베스트'(best)가 아니라 유니크한 존재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베스트는 단 한 명뿐이지만 유니크는 모든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베스트를 지향하는 교육은 줄 세우기 교육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성공시키려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선민답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를 4절의 첫 글자인 '들으라'를 따라 '쉐마'(shem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매일의 기도문으로 사용합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신명기는 특히 자녀들의 가정교육을 강조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6-7) 또 신명기는 사람의 눈길이 닿고 손길이 닿은 모든 곳에 말씀의 표식으로 붙이고 매 순간 확인할 수 있게 하라고 말합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8-9) 지금도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작은 상자에 담아 문 위에 붙여 두는데 그것은 '메주자'(mezuzah)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철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가르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배웠으면 몸에 익히고 몸에 새겼으면 태도로 증명하라"(다산 정약용)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실천하는 몸에서 나옵니다. 몸에 밴 습관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강론하고, 손목과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는 겁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좋아하기에 자꾸 되풀이하여 몸에 붙은 습관이 됩니다. 그 사랑의 습관이 나를 형성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과연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로 사랑하십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바가 됩니다.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습관에 따라" 반복하는 예배가 나를 형성합니다. 내가 예배하는 바가 내가 사랑하는 바이기에 나는 내가 예배하는 바가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예배합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합니까? 그 사랑이 몸에 익히고 몸에 새긴 사랑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에베소 4:13-1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을 담아내고, 그분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 2:52) 했습니다. 이 말씀은 소년 시절 이전에 아기 예수님이 자라가시는 모습을 묘사한 말씀과 거의 흡사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누가 2:40) 했습니다. 두 말씀 모두 예수님이 어느 한 부분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균형 있게, 전인격적으로 자라가셨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성장의 면면이고 기준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났다 했습니다. 지혜로 표현되는 지적인 성장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인은 성경 통독을 계획하고 성경 공부에 대한 의욕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쌓고자 하는 의욕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단순히 여러 번 읽는다고 해서 담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질문하고 토론하며 말씀을 깊이 상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유대인 소년들처럼 어린 시절 예수님도 모세오경을 다 암송하셨을 겁니다. 암송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학자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듣기만 하고, 읽기만 하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성경을 다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의 배경과 의도, 그 의미와 씨름하며 묻고, 듣고, 답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롭게 자랍니다. 그런 신앙인만이 현대 사회 속에서 수없이 제기되는 의혹과 의심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응답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성서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서에 관해 묻는 만큼 발견할 겁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질문에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평생 교육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 119:103)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즐거운 일로 느낄 수 있도록 히브리어 알파벳 글자에 꿀을 찍어 먹게 한답니다. 새해엔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과 더 가까이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키' 자라났다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성장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사실 요셉과 예수의 직업으로 알려진 복음서의 '테크토노스'(tektonos)는 목수보다는 일반적인 건설노동자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인근에 건설된 치포리나 그가 스무 살이 되던 무렵에 갈릴리에 새로 지어진 로마식 도시 티베리아스 건설현장을 오간 석수가 아니었을까 요즘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목수든 석수든 예수님은 육체노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몸을 움직이고, 육체의 힘으로 일하는 법을 익히셨습니다. 그 단련되고 건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이후 공생애 기간의 고된 일정을 감당하셨을 겁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 가치를 우선시하다가 우리 몸이 가진 영적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노동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육체노동을 낮게 보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십시오.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예수[님]의 손에는 십자가에 박혀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 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여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양손에 못이 박힌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의 손은 위대한 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손이 노동의 손이었기에 그 의미와 가치가 더욱 빛납니다. 노동으로 다져진, 알알이 굳은살이 박여 있는 그 노동자의 손에 대속(代贖)의 못이 박혔기에 예수님의 손은 더 위대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성장을 이루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관계이고 사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숙해지시고 친밀해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직전에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사회적 성장을 이루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의 타락은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죄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 만물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깨졌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깨어진 모든 관계의 회복을 위해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깨어진 세상의 정의와 평화, 파괴된 자연환경, 이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웃과 온 인류의 아픔에 공감하고 회복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중심주의에 빠져 사회적 소통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하면 된다는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 실상은 교회 중심주의의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냉철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날로 사랑스러워 가셨던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 끝을 보니 예수님은 성전에 남아 계시지 않고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누가 2:51)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소년 예수를 붙잡아두고 싶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율법을 토론하며 성장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를 따라 겨우 5백 명가량이 사는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으로 가십니다. 아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육신의 부모를 배려하신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유학을 포기하고 시골 마을에서 요셉의 일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성육신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 종교, 문화, 학문의 중심지가 아니라 변방의 시골 마을에서 부모를 모시고 힘든 노동을 하며 보내신 어린 시절은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의 삶 속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예수님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 2:52) 했습니다. 그분은 지혜와 키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하셨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소년 예수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 여름날, 너나 또 나처럼 /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동안 / 문 밖에서 놀기도 하고 / 마루에서 대팻밥을 모으기도 하던 /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 그러나 작은 새들 / 종달새, 소쩍새, 그리고 비둘기들은 /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새들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알아차리고 / 존경하는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 새들은 사람들을 대신해 죽은 / 어린 예수를 알고 그 이름을 기렸을 것입니다. // 해는 새벽녘 그의 머리카락에 / 남모르게 스며들어 / 보이지 않는 영생의 빛 한줄기 / 거기 남겨놓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 그것은 가시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이마 위에 / 사랑의 입맞춤을 뜻하며 드린 것이었습니다." (엘버트 페인, <어린이 예수>)

예수님의 어린 시절 기록은 너무 없어 소중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장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참 인간의 삶을 살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고 '단번에'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아기로 태어나 소년 시절과 청년의 때를 거쳐 날마다 자라가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더디더라도 매일매일 한 걸음씩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서에 진지하게 묻고 답하면서 지혜로운 말씀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습관대로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바가 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우리의 몸도 잘 관리하며 더욱 강인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1-24) 했습니다.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이 구습(舊習), 그러니까 낡은 생활 방식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대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새 옷을 입으십시오. 2023년 한 해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습관에 따라"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성장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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