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아름다움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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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35:1-4, 빌립보서 1:8-11, 요한복음 1:14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플라톤이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만물 박사 히피아스가 대답했습니다. '아름다운 소녀가 아름답습니다.' 플라톤은 '자네 말은 늦 맞지만, 아름다운 말도 아름답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플라톤은 '아름다운 송아지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나무도 아름답고...' 하면서 계속 이 목록을 이어갔습니다. 제자 히피아스는 결국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언뜻 보기에 성서는 아름다움에 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아름다움을 유혹의 원인 제공자로 보고 심히 경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 하신 금단(禁斷)의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창세기 3:6) 것이었다 했기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해 있다고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과 십자가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편 8:1)라고 시편 8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편 135:3)라고 시편 135편 기자도 노래합니다. 시편 27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the Lord)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시며 날마다 "보기시에 좋았더라"(창세기 1:4, 10, 12, 18, 21, 25, 31)라고 일곱 번이나 경탄하셨습니다. 여기서 '좋다'라는 히브리어 '토브'(tov)는 '아름답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맨 첫 책인 창세기의 맨 첫 장이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시편 19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편 19:1)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봇'(kabod)인데 그 뜻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사실 성서에서 영광과 아름다움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온 우주 만물에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의 신성과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짓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는 시내 산(Ms. Sinai)에 당도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그 산 위로 올라오라 부르십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출애굽기 24:15-18) 했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 있던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어떻게 성막(聖幕, tabernacle), 곧 회막(會幕, tent of meeting)을 만들어야 하는지 자세히 일러주셨습니다.(출애굽기 25-27장)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신 성막이 매우 예술적입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그 예술적 양식까지 일러주시는지 놀라게 됩니다. 성막 안 성소에 둘 등잔대를 어떻게 만들라 하셨는지 말씀하시는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이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출애굽기 25:31-35) 어떤 등잔대인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저는 여기까지 읽다가 도저히 안 그려져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성서의 하나님은 '예술가 하나님'이십니다.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다루시는 하나님'(God of the details)이십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삭막하고 척박한 광야에 생생한 색깔과 풍성한 장식의 성막이 세워졌을 때 그 성막이 어떻게 보였을까를. 성서는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애굽기 40:34-38)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즉 놀랍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임재를 두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작은 우주'였습니다. 성막은 저 이집트의 죽은 왕과 그의 사후 세계를 위한 피라미드와 달리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죽은 왕 대신 산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되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출애굽기 282)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하신 이유는 파라오의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을 일으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출애굽기 19:6)으로 삼으시겠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 곧 놀랍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야에 세워졌던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 가운데 세워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약성서의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 장막을 보니 출애굽의 광야에서 성막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하더라는 겁니다. 요한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이 놀랍도록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브리서 1:3)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공동번역)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셨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예수님은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그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 53:2)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몰골은 흉하고 추합니다. 사실 십자가는 미(美)가 아니라 추(醜)라 해야 옳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하고 조롱하고 고문하고 못을 박는 자들의 야만성과 분노 그리고 거침은 추합니다. 그래서 헤겔의 말처럼, "채찍질 당하고 가시관을 쓴 채 형장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서 거기에 매달려 고통으로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미(美)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를 부르며 제4절에 이르러 "아름답다 예수여!"라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며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이사야 53:4) 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했습니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그 고통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우리는 숭고하다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매료시키고 숭고는 감동시킨다"(칸트)라고 했습니다. 숭고(崇高)란 압도적인 감동의 체험입니다.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거대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성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는 "영광과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역설적으로 오직 겸손과 십자가의 치욕의 모습에서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는 우리를 위해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이사야 53:9, 7절) 이것은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참하지만 우리는 그 모습에서 나를 위해 희생하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역사상 최고의 추(醜)가 최고의 미(美)로 변화된 사건입니다."(폰 발타자르) 우리를 압도하는 이 감동 앞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누가복음 23:47)라고 고백하고 말았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로마 군대의 장교도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 곧 놀랍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임재를 두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보실 때 이것을 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과 음식을 나누고, 약자 편에 서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에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는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낮은 자들 사이에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장막을 치고"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선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내어줌이고, 하나님에게는 아들을 버리는 고통이며, 성령에게는 내어줌과 버림을 인내하고 견뎌 부활함입니다."(리처드 빌라데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미학(美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름답다 예수여!"라고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아름다움은 '아름'과 '다움'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품 안에 들어오는 그 무엇입니다. 옛날 추운 겨울에 싸늘하게 식은 방구들을 데우려고 나무를 한 아름 안고 돌아올 때의 따뜻함이 '아름'입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 꼭 안았을 때 품 안에 느끼는 그 따뜻함이 '아름'입니다. 이런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하나 됨'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정범의 <새국어어원사전>은 '아름답다'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아름답다[美]의 아름은 나[私]라고 여겨진다. 속담에 '고슴도치 제 새끼 함함하다'라는 말이 있다." 함함하다는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입니다. 털이 바늘같이 꼿꼿한 고슴도치도 제 새끼의 털은 부드럽기만 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은 자기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私]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나와 한 몸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려면 모든 대상을 내 몸처럼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합니다.

불교의 핵심사상인 동체대비는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중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부처와 한 몸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동체대비의 '비'(悲)는 함께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생명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것, 그것이 동체대비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아름'은 '앓음'입니다. 즉 '아픔'입니다. 그래서 앓지 않은 아름다움, 아픔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f you feel pain, you're alive; If you feel other people's pain, you're a human being." (만약 당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아닌 것을 나답게 여길 때 생기는 감정이 아름다움입니다. 사랑스러움입니다. 하나 됨으로 인해 알게 되는 아픔이 바로 동체대비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아름답다 예수여!"라고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아픔에 공감하고 참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나의 죄악 때문에 상하고, 나의 평화 때문에 징계를 받고, 나의 치유를 위해 채찍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와, 내가 그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생진 시인의 짧은 시 한 토막입니다. "못생긴 나뭇잎이 / 예쁘다 / 남을 먹여 살렸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어머니의 손이 주름져 아름답습니다. 주름진 깊은 골마다 새겨진 삶의 흔적에는 생명을 살리는 맑은 사랑이 흐릅니다. 농사지으시던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손은 거칠었습니다.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더라도, 그 손이 얼마나 아름다운 손인지 표현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실 적에 한 번이라도 더 잡아 드려야 하는데 이젠 그 아름답고 따스하고 거친 손을 잡아드릴 수 없는 분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손도 고왔을 리가 없습니다. 투박한 목수의 손이었기에 만약 그분이 지금 오셔서 내 손을 잡아주신다면 굳은살이 박인 그 손에 우리는 깜짝 놀랄지 모릅니다. 내 어머니, 내 지의 손, 그리고 예수님의 손... 못생기고 거친 손이었지만 나를 끊임없이 보살펴주고 살아오게 한 손인데 나는 늘 잘생긴 손만 동경한 건 아닌지 오늘 반성해 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은 아름다움에서 시작합니다. 머리로 이해한 교리가 아니라, 의무로 실천한 윤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전율하고 감동한 그 아름다움에서 시작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야 나는 그리도 오래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신선한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지만]...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우신다]"(시편 113:4-7) 했습니다. 온 우주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메마른 광야에 "장막을 치고"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느낄 때 시작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켈커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시작해봅시다." 그가 그 궃은 일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베드로전서 2:9)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했습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성서는 또 우리가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이사야 61:3)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풍성한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이사야 35:1-2) 때에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의의 나무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들로, 거룩한 나라로,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으로 오늘도 거룩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아름다움]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인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 1:8-11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점점 풍성하여 여러분이 최선의 것을 분별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움]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합니다."(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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