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마음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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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무엘기하 12장 1-12절

설교문

[다윗을 보는 관점]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신 분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겠지요. 저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사울 왕 앞에서 하던 말이 제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

키가 3미터가 넘고, 6킬로그램이나 되는 쇠창을 들고, 60킬로그램이나 되는 갑옷을 입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능욕했을 때, 다윗은 전쟁에 참여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주러 왔다가 우연히 골리앗의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가서 자기를 내보내달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말립니다. "그만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 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판단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놈을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삼상 17장)

어릴 때 몸도 약하고 몸집도 작아서 유독 겁이 많았던 저에게 이런 다윗은 정말 멋있었고, 그의 용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정말 멋지게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그 이후로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오른팔로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장군이 됩니다.

한편 다윗은 멋진 시인이자 하프 연주자였습니다. 시편의 상당수는 다윗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성구도 다윗이 쓴 것입니다. 성서의 또 다른 전승은 사울이 악한 영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윗이 음악치료를 통해 그에게서 악한 영을 떠나게 했다고 증언합니다. 용사이며 싸움에 능한 사람이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시인이라는 것은 왠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승들은 다윗이 양립하기 어려운 속성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사람임을 알려 줍니다. 사울 왕에게 다윗을 소개했던 한 젊은 신하는 다윗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사이며, 용감한 군인이며, 말도 잘하고, 외모도 좋은 사람인데다가,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삼상 16:18) 정말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이지요.

성서를 열심히 읽으신 분들은 다윗과 요나단의 깊은 우정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 다윗이 질투와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에게 어떤 곤경을 당했는지도 아실 것이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도 복수하지 않았던 다윗의 모습도 아실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하나님이 다윗하고만 유독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당신의 총애를 거둬가셨지만,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의 입을 통하여 다윗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삼하 7:15-16) 하나님이 다윗을 이렇게 특별대우 해 주셨기 때문인지 성서에도 다윗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1080번 정도 언급됩니다.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는 구약에서 772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구약에서 236번 언급됩니다. 게다가 '다윗'이라는 이름의 뜻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입니다.

[나단의 비유]

그런데 이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큰 죄를 저지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데려다가 정을 통합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그것을 숨기려고 계략을 짜고 결국은 우리야를 죽게 만듭니다. 이 행실이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고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로 보냅니다.

오늘 저는 다윗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함께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인 나단의 비유부터 보겠습니다. 등장인물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입니다.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자신의 많은 양과 소가 아까웠던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서 손님에게 대접합니다. 나단은 가난한 사람과 어린 암양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삼상 12:3) 이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분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합니다."

나단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기 전까지 다윗은 이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인 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임금 다윗의 판결은 죄를 지은 개인 다윗에게 바로 해당합니다. 즉 다윗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이고, 어린 암양의 값으로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합니다(출애굽기 21장 37절). 비유에서 부자는 많은 왕비와 후궁을 지닌 다윗이며, 가난한 사람은 바로 우리야이고, 가난한 사람이 아끼던 양은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과 양의 관계는 밧세바와 우리야의 부부관계를, 양을 잡아먹은 것은 간음을 상징하게 됩니다.

비유는 직접적으로는 이렇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 양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죽은 것은 우리야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을 밧세바로 볼지 우리야로 볼지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판결한대로, 우리야를 죽인 것 때문에 다윗도 자신의 아들 넷을 잃게 됩니다. 밧세바와 첫 관계에서 낳은 아들은 어린아이일 때 죽고(12장 19절), 헤브론 시절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하고(13장 28-29절), 압살롬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윗의 오른팔인 요압에 의해 죽임당하고(18장 14-15절), 또 다른 아들 아도니야는 솔로몬과의 권력 투쟁 속에서 죽임을 당합니다(왕상 2장 24-25절). 하나님께서 나단을 시켜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언한 것이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간음에 대해서도 똑같이 갚으실 것이라고 하는데,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을 벌입니다(삼하 16장 21-22절).

이러한 책망과 책벌을 이해하려면 다윗이 저지른 죄를 자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나단의 비유가 세부적으로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비유를 들은 다윗이 자신인지도 모르고 분개할 만큼 부자와 다윗이 저지른 불의는 그야말로 악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죄]

우선 다윗이 저지른 간음의 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밧세바를 발견했을 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다음 해 봄에,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맡겨서 출전시켰다. 그들은 암몬 사람을 무찌르고, 랍바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았다."(삼하 11장 1-2절)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있고 다윗은 왕국에 남아 있는 대조적인 상황, 겉으로 보이는 왕궁의 평화는 부하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급 상황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같은 시간에 생명을 걸고 전투에 임한 병사들의 상황과 낮잠을 누릴 수 있는 한가한 오후와 안일을 즐기는 왕의 모습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무엘서는 다윗이 목격한 그 여인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밝힙니다. 이어서 사건의 구체성을 더 강조하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 밝혀지고 언급되지 않아도 될 가계의 일부가 상세히 거론되는데, 이름은 밧세바,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 부친은 엘리암입니다.

그런데 엘리암은 이스라엘의 뛰어난 용사로 알려진 인물이고, 그의 부친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입니다(삼하 23:34). 아히도벨에서 도벨이라는 접미사가 이방계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이기에 밧세바의 가문도 이방 민족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야는 헷 사람 즉 히타이트 민족이라는 것을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야는 익명의 인물이 아닙니다. 다윗이 거느렸던 30인의 용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소아시아를 호령하던 히타이트 제국은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이미 사라진 왕국이었고, 그 후손들이 이곳저곳에서 여러 민족 사이에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왕상 10:29). 이들은 율법에 따라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출애 22:21),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34)

우리야와 밧세바는 다윗이 보호해야 할 약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야에게서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야를 결국 죽입니다. 만약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이 사무엘하 16장 15절에 나오는 인물 즉 다윗에 대한 압살롬에 반역에 함께하며 지지했던 인물과 동일인이라면 우리는 아히도벨이 다윗을 등진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입장에서 다윗은 손녀를 빼앗아 강간하고, 손녀사위를 살해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보호해야 할 여인을 마음대로 데려와 통정을 한다는 사실은 다윗이 왕으로서 신하들을 어떻게 짓밟을 수 있는 인물인지 말해 줍니다. 신하 중 한 명은 다윗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여자는 엘리암의 딸 밧세바로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가 아닙니까?"(11장 3절) 성경은 다윗이 그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폭군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브론 시절 다윗은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고(삼하 3장 2-5절),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여러 명의 부인들을 두었습니다(삼하 5:13-16). 이미 이렇게 많은 왕비와 후궁을 두고도 다윗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런 짓을 저질렀고, 곧 밧세바로부터 임신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다윗은 총사령관 요압이 있음에도, 명백한 이유 없이 우리야를 소환하여 마치 전선의 상황을 알아보듯 질문을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요압의 안부와 군인들의 안부와 싸움터의 형편을 물었다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 보면 모두 '샬롬'입니다. 즉 요압의 샬롬, 군인들의 샬롬, 전장의 샬롬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다윗의 불안한 무의식적 심리를 드러냅니다. 전쟁에 있는 백성은 오히려 평화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다윗의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명령하듯이 우리야를 아내 밧세바에게 보냅니다. "목욕하고 쉬라"고 번역된 것의 직역은 "발을 씻으라"는 것인데 이것은 성적 결합에 대한 완곡한 어법입니다. 그런데 충직한 우리야는 왕의 명령에 불복합니다(11:11). 놀랍게 이방계 출신 우리야는 하나님의 전쟁 규례(신명 20:1-20의 전쟁 규례)에 따라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야가 아내에게로 가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밤을 보냈기에 다윗의 책략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다윗의 계략은 술을 먹여 취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야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다윗의 행동은 상당히 이상하고 석연치 않아 보였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계략도 먹혀들지 않자, 이제 다윗은 우리야를 살해하기 위한 방법을 세웁니다. "너희는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앞세우고 나아갔다가, 너희만 그의 뒤로 물러나서, 그가 맞아서 죽게 하여라."(11:15) 요압은 다윗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전쟁의 상황을 전하는 전령에게 이렇게 지시하면서, 왕이 화를 내시면 우리야도 죽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11:18-21) 다윗은 우리야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요압에게, 칼은 이편도 죽이고 저편도 죽이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여라."(11:25) 우리야의 죽음이 마치 전투에서 생긴 우발적인 죽음인 양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압의 공모 과정을 보면, 모든 악은 단순히 우연적인 산물이 아니고 거짓된 공모의 결과란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요압은 우리야 살해 사건에 수동적으로 말려든 꼴이었지만, 능동적으로 그 일을 해냅니다. 이길 수 있는 전투 상황에서 패배를 조장한다는 것은 전투 부대를 이끌고 있는 장군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요압은 권력의 시종이 되어 죽음을 불러오는 폭력의 하수인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율법을 거스르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살해당한 자의 아내마저 빼앗습니다. 그것도 제3자의 손,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 요압 장군과 이스라엘 전 부대의 손을 빌어서 한 사람을 죽입니다. 다윗의 속임수는 사건과 무관한 자들을 끌여들여 죄악을 확대시키고, 음모를 통해 목적을 성취하는 또 다른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이 일에 대하여 너의 눈에 나쁘게 여기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 일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권력자들의 공모로 인해 한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난다면 이것은 생명 자체를 경시하고 천하보다 소중한 한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세계를 능멸한 것은 곧 생명의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야라는 사람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최고 권력자의 말은 곧 명령이고, 명령은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강제적 폭력을 뜻합니다. 더군다나 아랫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한 다윗은 욕망에 기운 자신의 행동이 약자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슴지 않고 모든 죄악을 행하였고, 많은 이들은 다 알면서도 권력자 앞에서 침묵의 카르텔로 숨죽이고 있었지만, 이들의 모든 죄악은 야훼 하나님의 빛에 의해 드러날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카인을 소환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죄악을 만천하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탐욕이 권력을 통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것을 제재할 방법은 없는지 묻습니다. 욕망에 눈먼 인간은 그 욕망이 식기 전에는 결코 자신을 볼 수 없으며, 스스로 죄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명확히 드러냅니다.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권력자 자신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고 불의의 원천일 때 진실은 삼켜지고 침묵이 강요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잘못 권력을 행사하는 왕을 고소하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 예언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는 대리자 역할을 완수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의 잘못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잘못을 지적하고 보여주는 제삼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에게 나단 예언자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며 죄에서 회심으로 이끌어 주는 안내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고 권력자가 은폐한 일을 누군가 드러내려 한다면 그에게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기에 나단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 사건은 다윗이나 이스라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 됩니다.

[다시 나단의 비유로]

다시 나단의 비유로 되돌아 오겠습니다. 비유는 아주 간단하지만 슬픔이 배어나는 인간사의 참혹한 비극성을 잘 드러냅니다. 가난의 절절함이 부유한 이의 무정한 행동과 대조되면서 고발은 절정에 달합니다. 부자는 손님 대접을 위해 자기 소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을 무시합니다. 손님을 대접하면서도 자기 소유의 소나 양 중에서 한 마리도 희생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바로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라는 고발입니다. 손님에게는 숙식을 제공하는 주인처럼 행세하지만 자기 것은 하나도 내어놓지 않는 부자는 가난한 이에게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인자하고 관용 있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는 왕정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미리 예고한 적이 있습니다. 왕이 독재자가 되었을 때 그는 백성의 아들들과 딸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군역과 노역에 쓸 것이며, 왕정 유지를 위해 부과하는 세금은 백성들의 고된 노동에서 뜯어낸 것이며, 백성은 자유를 잃고 종이 될 수 있어서 수고와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고 사무엘은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나단의 비유에서는 부자가 바로 모든 것을 막무가내로 빼앗아 갈 수 있는 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유는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한 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자의 유일한 행복을 빼앗았다는 날 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필요한 것마저 소유하지 못한 이들과 나누게 하는 것이 왕의 통치술이요, 특히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나눔을 통해 야훼 하나님의 초대를 실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유한 자는 자신의 소유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의 어려움을 덜어주어야 하고, 특별히 왕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본인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비유에서 손님은 환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손님은 자신을 대접하는 주인이 그에게 인자하고 관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주인은 인색하기 짝이 없지만, 손님은 그런 사실에 무지합니다. 그렇다면 손님도 모르는 부자의 행위를 누가 고발한단 말인가? 비유에서 가난한 이는 부자의 폭력을 고발할 능력도 없고, 자신을 방어할 수단도 없으며. 저항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는 나단의 비유에 대한 다윗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이 없는 인간의 일차적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찰은 누구나 잠시 멈추고 생각할 수 있는 너무도 쉬운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찰이야말로 사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양심을 불러낼 수 있는 긍정의 힘이자 기회입니다.

이제 다윗이 숨긴 진실이 드러납니다. 나단의 비유가 다윗의 양심을 깨웁니다. 왕은 스스로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죽어 마땅한 자가 바로 자기였습니다. 정의감 넘치는 다윗의 대답 후에 바로 나단은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권력 앞에서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양심을 일깨우는 사람입니다. 필요할 경우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이며, 용기와 힘을 내는 사람입니다. 나단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면서 과감하게 다윗에게 비판적인 예언들을 단숨에 모조리 쏟아 놓습니다.

나단의 비판 속에는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이 지니는 죄의 가능성이 녹아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야훼 하나님이 준 것으로 가득했지만, 다윗은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 요청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다 거저 받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주시는 분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빼앗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의 것을 뺏으려 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고 계속 되는 비교 속에서 욕망을 무한적으로 늘리려 합니다.

이런 욕망이 권력을 지니게 되면 누구나 다윗처럼 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사고가 난 지 7시간 만에 나와서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서민들,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장마 때마다 물난리가 나는데, 정치인들이 한다는 소리는 "사진 잘 나오게 비가 오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거리가 이렇게 멀고,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다릅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아들은 연봉 3000에서 5000만원 받으면서 5년 10개월 근무하고 퇴직할 때 퇴직금으로 50억을 받고, 검찰은 이것을 눈감아 주기 위해 대충 기소하고, 판사는 검사를 핑계 대며 무죄를 줍니다. 권력에 저항했을 때, 힘 있는 자들은 온갖 구실을 삼아 샅샅이 털어서 한 가족을 몰살시키고,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는 주가 조작에 온갖 죄를 지어도 수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다윗과 요압의 공모, 은연 중에 살인에 가담한 이스라엘 군인들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딸 같은 어린 암양을 빼앗는 일들이 가득하고, 모두의 침묵 속에서 약하고 힘 없는 사람만 당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권력의 정점에 목사가 서게 되자 인분을 먹으라는 말에도 순종하는 시스템이 작동됩니다.

그런데 이런 죄악들을 벌이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이 나단의 말을 듣고 부자를 책망하며 하던 말 중에 담긴 한 마디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모든 권력자는 약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돈과 권력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이것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마음 하나 길러내고 지켜내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동양 전통에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합시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참된 인간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돈이나 권력에 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더 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한눈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윗조차도 하나님을 잊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늘 조심하게 하시고, 깨어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실 때에 우리도 나누게 하시고, 언제나 약한 이들, 힘 없는 이들, 그래서 억울한 일 당하는 이들 곁으로 우리가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구하셨던 이들 곁으로 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던 그 울부짖음들에 우리도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새로운 한 해를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 우리가 모든 편견과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시고, 우리의 이해와 사랑이 깊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권세와 능력을 가진 이들이 나라와 세계에 정의와 자유를 세우기 위해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자들,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당신의 긍휼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나이의 장벽을 넘어서 젊은이와 늙은이의 친구가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픔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손길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우리가 감사함으로 다시 주님께 드리며, 이 세상에 나아가 성령의 손과 발이 되길 다짐합니다.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이 예물이 주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쓰이게 하소서. 물질 때문에 고난 당하지 않게 하시고, 물질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물질로 생명을 살리게 하시고 친구를 사귀는 지혜를 얻게 하소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거룩한 영의 애틋한 숨결로 살아가십시오.

* 축도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 앞에서 이끌어 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넘쳐나기를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기를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시기를

그분의 복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기를

그리고 여러분은 거룩한 땅 위를 걸어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y the blessing of God go before you.

May her grace and peace around you.

May her spirit live within you.

May her love wrap you around.

May her blessing remain with you always.

May you walk on holy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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