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유혹과 시험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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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7:10-11, 야고보서 1:2-3, 12-15, 마태복음 4:1-10

설교문

사순절(四旬節, 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여는 주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이 아니라 '유혹'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점을 기억해주십시오.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이 둘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사순절은 고행(苦行)의 기간이 아니라 참회(懺悔)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4:1-10, 공동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1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예수께서 주리신지라, "유혹하는 자(the temper, NRSV)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3절) 광야는 모래로 된 황무지가 아닙니다. 떡 덩어리와 같은 작은 석회석 조각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흉년으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을 풍성하게 먹일 것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나쁜 일을 하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 하지 않았느냐?"(4절)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그의 권능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용하도록 호도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의 성전 꼭대기에서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 하지 않았소?"(6절)였습니다. 유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담은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능력을 발휘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라. 그러면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훨씬 쉽지 않겠는가?'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마귀의 방법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7절)라고 성서를 인용하시며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벌써 두 번이나 좌절한 유혹자(the tempter)는 이제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9절)라고 유혹합니다. '인간들은 내 수중에 있다. 나와 흥정하자. 나와 조금만 타협하자. 너처럼 그렇게 높은 데 기준을 두면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대를 따를 것이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마귀가 유혹한 '천하만국'은 예수께서 선포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통치)'와 확연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 메시아적 통치를 사탄의 주권에 굴복시켰다면 그 나라는 악의 세력과 싸움 없이, 아무런 반대 없이, 그리고 십자가 없이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한 '노'(No)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 하시지 않았느냐?"(10절)라고 다시 성서를 인용해 대답하셨습니다. 결국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했습니다.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보살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유혹)은 많이 들어서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개의 서로 다른 유혹이 있었다기보다 한 가지 유혹의 세 개의 서로 다른 변형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혹하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태초 때부터 악마는 '권력을 차지하라'라는 유혹을 해왔습니다. 뱀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꼬드길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세기 3:5)이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계속 전제한 것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절, 6절)입니다. 더 좋은 번역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고, 선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유혹한 자는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도 똑같이 주님을 유혹합니다. 예수께서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며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고 모욕하였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주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유혹하는 자는 세상 맨 처음부터 맨 끝 날까지 계속해서 똑같은 제안을 귀에 속삭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이런 악마의 속삭임에 솔깃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광야 유혹을 '외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유혹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었던 내면적인 투쟁이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었습니다. 시험(test)이 외적인 것이라면 유혹(temptation)은 내적인 것입니다. 유혹자의 공격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유혹하는 자는 우리의 가장 깊은 정신과 욕망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시험이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혹은 어떤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여 그것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험은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유혹은 눈앞의 만족을 위해 미래의 불행을 감수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맛있는 디저트를 보고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디저트를 먹게 되면 지금 당장은 기분이 좋아지지만 내일 아침에는 불행을 경험할 것입니다.

시험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파라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단련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명기 8:2) 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게 없다고 이스라엘이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비 같이 양식을 내리시며 그 이유가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명기 8:16)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출애굽의 하나님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한다]"(신명기 13: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창세기 22장) 이런 시험의 목적은 시험을 받는 사람이 그 시험에 의해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고난이나 시련 자체를 하나님의 저주나 징벌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고난이나 시련은 신앙을 연단하기 위한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고난받을 때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 5:11-12, 누가 6:22-23)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베드로전서 4:12-13) 했습니다. 이런 시험은 연단을 위한 겁니다. 한 시편 기자는 이런 시험을 놓고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다]"(시편 66:10)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야고보서 1:2-15)도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자매]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하면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절) 말합니다. 그런데 후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견디어 낸 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거라고 하더니 뒤에 가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시험이라 번역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를 유혹으로 다시 번역하면 우리는 진정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조깨기까지"(히브리서 4:12)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로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2, 12-1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련이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상을 거부합니다. 인간이 받는 시련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신학을 거절합니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혹은 도대체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개역개정)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그 욕심이 죄(하마르티아)를 낳고, 이 죄가 인간을 죽음(타나토스)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도 인간의 이런 이중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1-24)

도대체 인간 안의 욕심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야고보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유혹당하는 사람이 그 유혹에 동의할 때 잉태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유혹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유혹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려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16-17절, 공동번역) 하나님은 시련과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야고보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 원주민 추장이 자녀들을 모아놓고 이런 가르침을 주었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단다. 두 마음은 서로 절대 지지 않으려고 싸워서 마치 늑대와도 같지. 한 마리는 악한 늑대란다. 미움, 분노, 살인을 부추기지. 다른 하나는 선한 늑대란다. 용서, 사랑, 화해를 하게 하지.' 그러나 한 자녀가 물었습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추장은 엄숙한 눈빛으로 이렇게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했습니다. '그건 네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렸지.'

악마의 가장 큰 속임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은 얼굴이 없습니다. 아니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악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내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내 안의 어둠 속에 꽁꽁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악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내게 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기 싫은 부분이 있어도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속이지 않게 됩니다. 이사야는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이사야 47:10)라고 질타합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역경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성공과 번영을 잘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토머스 칼라일)라고 합니다. 실패보다 성공이 더 위험합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의 강한 곳 바로 그곳을 우리가 항상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 6:13, 누가 11:4)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대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씀입니다. 한 영어 성경도 이렇게 번역합니다.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KJV) 예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통의 잔을 받지 않을 수 없느냐고 하나님께 매달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누가 22:44)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향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누가 22:40, 개역개정)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유혹에 동조하는 욕심이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욕심을 통제할 수 있다면 유혹을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욕심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생각이, 유혹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런 악한 생각이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삶을 살 때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순절이 바로 그것을 위한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입니다. 참회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둠을 깨닫고 그것과 용감히 대면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유혹당하는 사람의 주체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파라오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이스라엘은 배가 고파, 목이 말라, 그리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 = 신명기 8:8)라는 말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 신명기 6:10)라는 말씀, 그리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 4:11 = 신명기 6:13)라는 이 세 말씀은 모두 이때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이 광야의 유혹에서 실패했을 때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예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예수께서는 이기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돌들로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권세를 거부하셨지만,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높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를 떠받치는 장관(spectacle)의 연출을 거부했으나 갈보리 산 높은 십자가 위에 달려서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다 이기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그분이, 그 유혹을 다 물리치신 분이 자신의 약함 가운데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히브리서 2:18)라고 성서가 이야기합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린도전서 10:13, 새번역)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지금 예상치 못한 시련과 유혹 가운데 있을지라도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에 유혹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실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가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실 겁니다. 이 의지와 이 신뢰가 바로 믿음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4-5) 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고행(苦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참회(懺悔)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안의 어둠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과 기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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