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잃어버린 아들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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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31:18-20, 골로새서 3:12-15, 누가복음 15장

설교문

누가복음 15장은 신약성서 중에 잘 알려지고 많이 사랑받는 장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탕자(蕩子, prodigal son)'란 '물을 흐리게 한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어찌나 유명한 이야기인지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고, 각종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도 종종 재연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신다는 이야기로 해석되어,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단연 가장 긴 이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은 따뜻하게 품은 아버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비유의 청중(聽衆, audience)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죄를 짓다 돌아온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왜 그런 자식을 받아 주냐고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절)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교를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땅의 사람들'이라 부르며 그들과 어떤 접촉도 금지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그들의 손님이 되거나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인은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거꾸로 "죄인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 기쁨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이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4-6절) 그리고 이렇게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으면 하늘에서는 기쁨이 넘친다고 말씀하십니다.(7절) 이어서 예수님은 '잃은 은전(드라크마)을 찾은 여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8-9절) 당시 혼인한 여인은 혼인의 표시로 은사슬에 열 개의 은전을 꿴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는데 잃어버린 은전은 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결혼예물과 같은 것이니 그걸 찾기 위해 여인은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주님은 다시 이 기쁨을 강조하십니다.(10절)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역시 누가에만 나오는데, 저는 일부러 말씀 제목을 '잃은 아들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바꿨습니다. 이 비유는 작은아들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반부(11-24절)와 큰아들에 관한 내용을 담은 후반부(25-32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후반부에 나오는 또 하나의 아들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1절)라는 평범한 구절로 이 비유는 시작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서먹합니다. 고대 세계의 아버지들은 냉정하고 권위가 있습니다. 그들은 통상 자식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들은 문자 그대로 자식들을 소유했고 자녀들의 결혼도 임의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갑자기 이렇게 요구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식을 내게 주소서."(12절)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한다는 건 아버지가 급사하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건 아버지에 대한 커다란 모욕입니다. 이럴 경우 보통 유대인 아버지는 자식과 의절합니다.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집회서>에는 이런 충고가 있었습니다. "너는 아들이건 아내건 형제건 친구건,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권력을 양도하지 말아라.,, 네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가 오거든 네 재산을 나누어주어라."(집회서 33:20-24)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라]"(12절)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본질(ousia)에서 내게 속한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는 가 가운데서 그의 생명(bios)을 주었다." 아버지의 행동은 청중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3-16절) 향락(享樂)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근이라는 재앙이 닥쳤습니다. 유대인인 작은아들은 이방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추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말은 배교(背敎)의 죄까지 범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레위기는 돼지가 부정(不淨)한 동물이며 "이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주검에 닿아도 안 된다"(레위기 11:7-8)라고 말합니다. 작은아들은 지금 가족만이 아니라 토라(율법)로부터도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아들은 "스스로 돌이켜"(17절) 아버지 집으로 향합니다.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말입니다. 누가는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한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집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집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 자식을 기다리지요. 이 아버지도 그랬나 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지평선 위에 나타난 그 순간에 그를 즉시 알아보고 달려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고대 청중의 관점에서 보면 이 아버지는 여전히 바보이고 명예심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보통의 가부장적 유대인 아버지들은 절대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란 지 이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끝내기도 전에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절)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왜 돌아왔는지 묻지도 않았고 징벌도 없었습니다. '내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라는 자세였습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외쳤고 잔칫집에 있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24절) 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해피엔딩' 스토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 나라가 생일잔치와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갑자기 큰아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25-28절) 큰아들은 아마 중년의 사내였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잘 감당하고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소처럼 열심히 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큰 잔치가 벌어졌을 때도 그것을 모르고 밭에 나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까이 와서야 무슨 일인지 알고 불같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잔치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사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간청하는 모습은 유대교 가부장 문화에서 큰 굴욕입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비아냥거리며 쏘아붙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큰아들의 말속에는 평소 그가 어떻게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드러납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을 '내 동생'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이 아들"(30절)이라 부릅니다. 냉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 말했는데, 이 말에서 '섬겼다'라는 동사는 '종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맏아들은 스스로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라 품꾼도 아닌 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은 그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한 여러 해가 사랑의 봉사가 아니라 냉혹한 의무에서 나왔나 의심하게 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빨리 죽어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긴 비유는 아버지의 이런 다정한 말로 끝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아버지는 큰아들을 "얘야"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My dear child"입니다. 애정에 찬 용어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음성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냉담했으며 거리를 두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작은아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부둥켜안고는 입맞춤을 거듭한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지금 큰아들을 살갑고 친밀하게 부르는 그의 음성에서 우리는 이 아버지가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렘브란트가 왜 이 유명한 비유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둘째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을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굵은 손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같이 가늘고 긴 손으로 그렸는지 이해됩니다. 이 그림에서 큰아들은 옆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이 두 사람을 무섭게 지켜보고 서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도 기쁨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말은 누구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드러납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아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누군가가 집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 줄어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합니다. 더 많은 포도주, 더 많은 음악, 더 많은 춤, 그리고 더 큰 잔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큰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도 이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이 잔치를 '못마땅해' 하는 큰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큰아들은 아버지가 연 이 큰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을까요?

이른바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0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구절을 가장 닮은 구절이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예레미야 31:18-20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기뻐하는 자식"인 에브라임이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새번역)라는 말씀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는 '긍휼'(矜恤)이라고 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긍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God of compassion)입니다.

언젠가 '바람의 딸' 한비야 선생이 남부 아프리카에서 AIDS로 고통 받는 현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엄마 아빠들이야 잘못해서 걸렸다고 치고 부모에게 감염된 애들은 무슨 죄로 죽어가야 하냐고 그는 물었습니다. 그 거대한 아프리카 절반 이하가 AIDS로 멸절할 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AIDS로 죽어가는 그 아이들을 하루에 몇 명 죽었는지 숫자로만 기억하지만 한비야 선생은 그 아이들이 다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3살짜리 아이들이 감염되어 피부가 가려워 긁다가 피가 터지면 무슨 외계인처럼 푸른 피가 아니라 우리처럼 붉은 피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죽으면 부모는 하루를 통곡합니다. 어느 날 AIDS로 초토화된 마을에 긴급구호 활동을 나갔습니다. 이런 지역에 가면 긴급구호팀에 한 가지 하달되는 수칙이 있다고 합니다. 지치면 아이들을 안아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부 접촉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폐허처럼 망가진 한 마을에 들어가니 나무 밑 여기저기에 아이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는데, 동글동글하게 생긴 신기한 동양사람이 오니 그 아이들이 하나씩 일어나 자기에게 달려오더랍니다. 사랑이 그리운지 안아달라고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한비야 선생은 그 자리에 목석처럼 굳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벌써 와락 안겼습니다. 이윽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들을 하나씩 꼭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날따라 하얀 옷을 입고 갔는데 온 옷에 피고름이 범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그 아이들을 안아준 것은 평소의 내가 아니에요. 나는 겁도 많고 소심해서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그때 거기에서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 마음 제 마음 아니에요. 하나님 마음이에요." 긍휼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집을 나가면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자식을 기다립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식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부모는 자식이 뉘우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식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영원히 짝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영원한 짝사랑입니다. 언제 우리가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뉘우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편 145:8)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예레미야애가 3:22)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 그 마음을 우리가 닮을 수는 없을까요.

오늘날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그리고 온 세상에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신은 오직 자기 편이시거나 자기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비로소 내 안에는 강박적인 자기 의로움에서 벗어나 타인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비의 공간이 생깁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태 12:7)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바태 23:23) 질타하셨습니다. 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소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이른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마태 5:7)이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와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골로새서 3:12) 합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Archbishop Desmond Tutu)는 God Has a Dream (하나님께서는 꿈이 있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미국의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이라고 외쳤는데, 투투 주교는 "God has a dream"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네가 도와주면 좋겠구나. 그 꿈은 이 세상에서 추함과 더러움과 빈곤이, 전쟁과 증오가, 탐욕과 끔찍한 경쟁이, 소외와 불화가 변하여 그 반대가 되는 것인데, 그때 거기에는 웃음, 기쁨, 평화가 있게 될 것이고 그리고 정의와 선과 연민, 사랑과 배려와 나눔이 있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 인류공동체, 하나님의 가족, 나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꿈이 있단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잃었던 것을 찾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누가 19:10)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찬송가 "Amazing Grace" 가사처럼,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나는 이전에 잃어버린 자였으나 하나님께 의해 되찾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는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소유를 잃었을 때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애쓴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를 찾기 위해 애쓰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잃은 것을 되찾았을 때 그토록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시는 자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아 돌아온 자기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긴 그 형처럼 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는 거기서 끝났습니다. 이 비유의 3막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이제부터 여러분이 써나갈 차례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한 가족,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꿈에 참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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