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종려주일 설교] "나는 그를 모르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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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53:1-3, 베드로전서 2:22-25, 누가복음 22:57

설교문

고대 로마의 정치인 플리니(Pliny)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미신'이 있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신으로 추앙되는 사람이 국가의 공공의 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이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위협하는 정치범들에게 내리던 벌이었습니다. 인류가 고안한 사형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사형수는 몇날 며칠을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갑니다. 종종 몰약(沒藥, myrrh)이나 신포도주를 사형수의 입에 찍어주는데, 목이 마를까 봐 배려하는 게 아니고 사형수의 의식이 혼미해져 고통을 못 느낄까 봐서입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몰약을 탄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아니하"셨다 했습니다.(마가 15:2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그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습니다. 장정들은 보통 2~3일을 견디지만 예수님은 이미 심한 채찍질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습니다. 십자가의 의학적 사망원인은 '점진적 질식사'(gradual asphyxiation)입니다. 어깨가 단단히 묶여 있고 손과 발에 못이 쳐있는 상태에서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인간은 서서히 숨이 막혀 죽어갑니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서 6:14)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정치인 플리니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신'을 믿는, 정신 나간 사람들로 보았던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십자가' 하면 먼저 떠오르기 게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고 은유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을 좋아하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사랑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상징이고 은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으셔도 됐습니다. 그 길이 죽는 길이라는 건 누구나 알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과 로마제국은 어떻게 그를 죽일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요한 2:17, 새번역)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열정(passion)은 '뜨거운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 사랑이 그를 수난(The Passion)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사랑은 십자가로 귀결됩니다. 사랑하면 십자가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불의와의 대결을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으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 23:44-46)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최후의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모습을 보고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누가 23:27)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백부장이 한 말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가 15:39)였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사람은 무죄다'라는 뜻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예수님 옆에 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했을 때 다른 하나가 그를 꾸짖으며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누가 23:39-41)라고 말한 것을 보도하며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저항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그의 고향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신다고 설교했고, 이를 듣다 분노한 청중은 예수님을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누가 4:16-30)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더러운 영이 들린 한 사람은 큰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누가 4:34,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 공동번역)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사역의 시작부터 예수님은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누가 4:18-19)를 전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과 자비와 진실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과 자비와 진실에 저항했습니다. 빛이 싫어서 어둠 속에 숨었습니다. 요한은 이를 두고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한 3:19)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어둠이 빛으로 드러나는 걸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려 합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속이며 어둠 속에 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도망쳤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집에 끌려가셨을 때 그 집의 뜰에 숨어든 베드로는 한 여종이 그를 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라고 지목하니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누가 22:57,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 새번역)라고 부인합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도당이라" 하니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누가 22:58)라고 재차 부인합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누가 22:60)라고 세 번째 부인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 뜰에 잡혀 계시던 주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비로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는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누가 22:61-62)하였다 했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이 말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은 그의 진실이었고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3년이나 따라다닌 그분을 정말로 몰랐습니다. 신앙생활 30년 했다 한들 예수님을 정말로 안다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도저히 그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실 때에"(마태 16;21) 주님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강력히 항의했던 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정말로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힘 센 메시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도대체 왜 십자가에 달려야만 합니까. '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 고통의 길을 가리셔는 겁니까?' 베드로는 그렇게 묻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질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길이 이해 되십니까?

"주 예수여, / 나 역시 당신을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 그래서 뺨을 스치는 새벽바람은 싸늘하고 / 때를 알리는 닭 울음소리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습니다. // 학자들이 잔꾀를 부려 / 당신을 비웃고 조롱하고 저주하며 / 실컷 모욕한 뒤 죄를 뒤집어씌워 / 나중에는 십자가 형틀에 매다는 동안에 / 나 역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데이지 콘웨이 프란시스, <부활절의 기쁨> 중에서.)

누가복음에는 두 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를 위한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히 맡기는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34,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 새번역)는 주님의 용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3)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용서하고 있습니까? 그를 버렸던 제자들? 그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로마의 군인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르던 유대 지배층을?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슨 짓인지 알고나 있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죄에 대해 알고나 있을까요? 주님은 그런 우리를, 우리 모두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아름답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추합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고문도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린도전서 1:23)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험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아름답다 예수여"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에는 또 하나의 기도, 즉 '온전히 맡기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2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새번역)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누가가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지상 최후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오늘의 교독문 시편 31편 5절에서 인용하신 겁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편 31:5)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새번역)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 어린이와 부모들이 잠들기 전에 드리던 저녁기도입니다. 시편 31편 기자는 자신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면서(15절),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letting go)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밤마다 다음날 아침 어떻게 깨어나리라 확신하고 그렇게 편히 잠에 드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 오늘도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 내일 아침 잊지 말고 깨워주십시오." 나태주 시인의 <잠들기 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없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진심으로 맡깁니다.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여,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31:5, 새번역 + 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자기만의 십자가를 하나씩 등에 지고 삽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십자가입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십자가입니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나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대로 버리고 싶으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자 은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사랑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또한 완전한 사랑의 상징이자 은유입니다. 무엇이 내 십자가입니까?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 16:24)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지 않으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무엇이 내 십자가입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가 고통입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기에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자녀가 아프면 내가 밤새 아프지만, 내 자식이 굶으면 내 창자가 끊어지나,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아프고 굶어도 나는 밤에 잠 잘 잘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게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사랑은 기쁨도 주지만 고통도 줍니다. 사랑은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옵니다. 사랑하니까 아픕니다. 그래서 나는 내 어머니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내 아내의 십자가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가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이사야 44:2) 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으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누가 23:47, "이 사람이야말로 죄 없는 사람이었구나!" - 공동번역)라는 로마 백부장의 말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열정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주님은 그 사랑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등에 지고 그 사랑의 고통을 이겨내며 날마다 주님을 따르십시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십시오]." 식민지가 된 민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민족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 시인처럼, 만약 여러분에게도 오늘 이 '사랑의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 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십시오.

"십자가의 도가[길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고린도전서 1:18-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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