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편 138편 1-8절, 에베소서 5장 10-20절
설교문
[시편 이해]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신약만 따로 떼어 놓은 성경에도 시편이 함께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2021년 11월 30일에 대한성서공회가 새롭게 번역하여 출판한 새한글성경 신약판에도 시편이 붙어 있습니다. 모두 150편으로 된 시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의 노래집으로 또는 기도서로 기원전 2세기 말경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시편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기원전 1000년부터 약 800년 동안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겪은 다양한 신앙적 체험들이 들어 있습니다. 민족이 함께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개인들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자신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의 왕권과 지혜를 힘껏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인 시온에 대하여 찬미하고, 예배의 중요성을 기리며 참된 왕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백성은 이 시편을 읽으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노래하였습니다. 시편으로 예배하며 고난을 헤쳐 나가고, 신앙을 다지고 굳세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8편부터 145편까지는 모두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표제가 곧 다윗이 저자임을 밝혀 주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시편 138편부터 145편까지는 각 개인의 소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하고 있는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심장으로, 각국과의 외교를 비롯해 법정의 역할, 은행의 역할도 감당했습니다. 따라서 억울한 일들을 당한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하소연하고, 하나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는 제사장들을 재판관으로 세워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을 쓴 사람도 억울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6절과 7절을 통해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를 알아보시고, 고난을 당한 시편 저자에게 손을 내미시고 힘을 주시고 원수들의 분노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노래합니다.
"주님,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들 앞에서, 내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내가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님의 진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온갖 것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내가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1-3절)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이 시편 저자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온갖 것보다 더 높이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신들 앞에서 주님께 찬양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사람은 온갖 이방신을 섬기는 사회에서 곤역을 치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크고 힘이 센 강대국들이 포진해 있었고, 이들 또한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며 자신들의 통치방식을 이스라엘에게 강요하곤 했습니다. 고대 히타이트 제국이 약소국들과 맺은 종주계약을 보면 속국은 종주국에 대하여 철저하게 충성하고 복종해야 하며 일정의 양의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고대 제국은 계급 질서에 기반하여 운영되었기에, 신분이 낮은 자가 고귀한 자를,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없는 자가 있는 자를, 못 배운 자가 배운 자를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논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곤궁을 당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했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경쟁을 통해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거머쥡니다. 빈부 격차의 양극화는 출발선부터 다르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 입학생 중 8명 중 1명은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 출신이고, 65%가 수도권 출신이었습니다. 매과목마다 과외 선생님을 붙일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집과 알바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학생은 다른 출발선에 있는 것입니다. 가난은 유산처럼 대를 이어가고, 거대한 자본 권력 앞에서 때로 초라해 보이는 자신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팍팍한 삶에 지치고, 버거운 생존 그 자체에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소확행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저 꿈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큰 문제 중 하나는 어느 정도 중산층에 진입해도 삶에 참된 안식과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훨씬 넉넉해지고, 여유도 생긴 것은 맞지만 삶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허무함이 몰려옵니다. 복잡다단한 인생 속에서 언제나 억울한 일이 발생할 수 있고, 예견치 못한 불행도 찾아오고, 한순간에 바닥을 보이는 일들도 생깁니다. 삶의 객관적 지표가 나아져도 주관적 삶의 질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들과 힘센 자들은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은 법 위에 군림하고, 자신들만의 카르텔 속에서 상부상조합니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고착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에는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기를 당하고, 폭력의 희생물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이런 불행과 위험의 늪에서 구원받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종종 말씀드렸지만, 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무척이나 작고 왜소한 체구였습니다. 그래서 키가 크고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친구들을 보면 혹시나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남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반에서도 누가 짱(長)인가를 두고 세력 다툼이 있을 때면, 저는 한쪽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제 키가 자라면서 일찍 키가 자랐던 친구들보다 더 커지게 되었을 때, 여전히 큰 키는 아니었음에도, 겁과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위로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나란히 보거나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시원한 마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늘 당하던 삶을 살던 이가, 모든 억울함을 풀고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그 마음은 정말 하늘로 솟구칠 것입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모든 왕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노래하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시편 저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왕도, 권력을 가지고 뽐내는 이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칭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절망의 동굴에도 한 줄기 희망이 찾아들고, 생각지도 못한 은혜로 무사히 위기를 넘깁니다. 그때마다 우리 또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를 보살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생겨서는 안 되는 위기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만큼 우리 사회와 우리 주변 모든 이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보다 공적인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오늘날 희망 없다고 하는 이들,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는 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어가고 발견하는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분별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나에게 좋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하라는 것은 한 개인을 넘어 이 세상과 역사를 살피고 지탱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과 역사를 성찰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고 분별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이웃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하라고 한 에베소서 저자는 곧 이어서 어둠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어둠을 폭로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 어둠의 자식들이 몰래 하는 일,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그 일들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환히 비추어 주시기에 너희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깨어 모든 것을 드러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계속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시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 때문에 허우적대다가 하나님께 하소연해서 구원받는 것도 매우 좋은 일이지만, 고난이 닥치기 전에 미리 어떻게 살면 좋은지를 살피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고난을 피할 수 있다면, 미리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듯,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최소한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지혜로와도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예견하여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세월도 잘 타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두 주간 생명사랑 목회자 공부 소모임에서 목회자들이 모여 갈등을 어떻게 인식하고, 건강하게 풀어가고 전환할 수 있는지 배우고 있는데 아주 유익합니다. 갈등을 공동체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징조로 읽어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면 갈등을 통하여 공동체는 거듭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저자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하는 첫 마디는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인데,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현재를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사는 첫째 방법은 바로 주어진 지금을 잘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금을 잘 살아내는 방법 중에 하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모두 꺼리고 싫어해서 '죽음'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죽음을 멀리하고 피하면서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갑자기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분노와 우울 사이를 오가다가 그냥 허무하게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지 말고, 죽음을 삶 안으로 끌어오면 우리 삶이 한층 더 소중해집니다. 죽음을 성찰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생생하고 의미 있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면 집착과 고착에서 풀려날 수도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어느 분의 사연을 들었는데, 자기 시아버지가 작년에 암 진단을 받고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아서 올해를 맞이했고, 가족들과 함께 봄에 핀 벚꽃을 보면서 매우 행복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사는 사람에게 찾아온 봄은 이전의 봄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꼭 죽음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정말로 세월을 아껴서 매 순간을 깊고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낸다면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낭비하는 또 하나의 큰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바로 헛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 순간 충실하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몰두하는 일이 사실 너무나 쓸데없는 일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시간 낭비일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는 일,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습관, 인간의 삶에 궁극적 의미를 줄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일 등이 그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쓸데없는 일은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는 것, 세상의 평판에 휘둘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욕구와 적절한 욕망을 넘어 멈출 수 없는 탐욕을 부리는 일 등입니다. 이런 일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맹목적 신앙", "묻지마 믿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출항하는 배가 있다고 합시다. 그 배의 선장은 매우 믿음이 좋다고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날씨가 좋지 않으니 이번 출항은 연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또 배의 상태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 좋다는 이 선장은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믿음이 없냐고 핀잔을 주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선장을 믿고 그 배에 타야 할까요? 그동안 많은 교회가 이런 식의 믿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선장의 믿음은 올바른 앎을 무시하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뢰하려면 그 사람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모르고서 그분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자신과 많은 사람을 위태롭게 합니다. 때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그것, 즉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줄 모릅니다. 하나님 아닌 자기 신념을 되풀이하는 것이기에 결국 고통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이웃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일반 시민들과 교류하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의 내용들을 소통 가능한 일상 언어로 바꾸는 훈련을 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추동하는지, 사랑을 증대시키고, 자기를 존중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취하지 말고 깨어 있는 정신과 뜨거운 가슴으로]
오늘 에베소서의 저자는 술에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에게 금주령을 내리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휘둘린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돈에 취하고, 힘에 취하고, 재미에 취하고, 쾌락에 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방탕하게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취할 때 얻어지는 말초적 기쁨이나 방종에 자기를 내어 맡기고 맙니다. 이단에 빠지거나 광신도가 되어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삶을 망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감정과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무시하고 종교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도 광신도 못지않게 세상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가치에 맹목적으로 물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술에 취하지 않고 깨어 있는 정신을 지니는 것은 어디에서나 중요합니다.
한편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슴에서 지펴지는 불을 억누르기도 합니다. 세상의 눈치와 억압 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는 학벌이 사람을 억누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동물이 된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영감 어린 작품들마저도 돈벌이로만 취급합니다. 이런 사회는 예술가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게 됩니다. 남북이 갈라져 오랜 세월을 보낸 우리 안에는 자신도 모르게 차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저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유독 "여러분의 가슴으로"라는 말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에도 사용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합니까? 여러분의 가슴으로 마음 바쳐 하고픈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삶을 사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정성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된 태초의 그 시간으로 회복하는 데 사용되길 빕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되찾는데 적용되길 빕니다. 원래 우리 인류는 거룩한 것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저 하늘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발은 단단하게 땅에 뿌리박고 있지만, 우리의 가슴이 뛰놀던 자리는 그냥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받아 껴안는 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땅을 밟고 서 있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다운 별을 보며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가슴 벅찬 열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으로 신앙의 길을 가시길 빕니다. 지혜로운 사람답게 행동하시길 빕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감사가 넘치는 일이길 빕니다. 우리가 진정성 있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지혜이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리라 생각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구원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세상은 갈수록 험악해지고, 때가 악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소견대로 행합니다. 주님! 우리를 이끄셔서 주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처신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도 낮은 자를 돌아보시며 오만한 이들의 교만을 꺾으신 주님을 닮아 우리 생명사랑 식구들이 빛 가운데로 걸어가며 어둠을 폭로하고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의 이웃이 되게 하여 주소서. 세월을 아껴 주님의 일에 매진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가슴 속에 지피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게 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봄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요, 지혜이십니다. 주님은 겸손이요, 인내이십니다. 주님은 쉼이요, 평안이십니다. 주님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주님은 아름답고, 온화하시기에 주님은 우리의 부요함이요,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우리의 위로이시며,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 앞에 우리가 나올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영혼과 몸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우리가 드린 예물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주님의 구원 활동에 한 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아들딸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지피신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뜨겁게 살아가십시오.
* 축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지혜롭게 살아가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전국의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본 글은 2023년 4월 30일 생명사랑교회 주일예배에서 한문덕 목사가 전한 설교문 전문입니다. 설교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