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28:1-5, 히브리서 11:17-21, 마태복음 22:31-32
설교문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 이야기는 창세기의 중심부(25~3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동생 야곱이 형 에서를 이긴 이야기, 비록 속임수로 형의 복을 가로챘지만, 허벅지 관절이 부러질 때까지 하나님께 복을 달라 매달려 결국 동생 야곱이 복 받은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도 야곱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아니면 어떡합니까. 야곱이 받은 복은 과연 어떤 복이었나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긴 종교분쟁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두 형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부터 경쟁하며 싸우자 걱정된 어머니는 주께 나아가 물었는데,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세기 25:23, 새번역)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 싸웠습니다. 유대교 뒤에 태어난 기독교는 유대교를 이겼다고 말했고, 기독교보다 더 늦게 태어난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를 이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세 종교는 자기가 아브라함 언약의 유일한 상속자라고 주장하며 싸웠습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 안에는 겉으로 보이는 서사(敍事, narrative) 안에 그에 맞서는 다른 서사(counter-narrative)가 미묘하게 얽혀 있어서 치밀하게 본문을 살펴보아야만 '예상 밖의 진실'이 드러난다고 랍비 조너선 색스(Joathan Sacks, 1948-2020)는 주장했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 21세기를 위한 창세기 (Not In God's Name: Confronting Religious Violence)』 (한국기독교연구소, 2022).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아마도 이란성 쌍둥이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몸이 붉고 온몸이 털옷 같아서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이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 즉 '발꿈치를 잡은 자'라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장자가 되려고 싸웠습니다. 형 에서는 커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고 들사람이 되었으나, 동생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텐트)에 거주"하였다 했습니다. 아마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형제 사이에 갈등이 높아진 데는 부모 탓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두 형제 이야기의 첫 장면은 에서가 사냥하다 지쳐 집에 돌아와 야곱이 만들고 있던 죽(stew) 냄새를 맡고 좀 달라 하는 장면입니다. 사냥꾼은 사냥의 성공에 완전히 의존합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올 수도 있고 아주 늦게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언제나 손안에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야곱은 흥정합니다. 죽을 줄 테니, 맏아들의 권리를 달라고 합니다. 야곱이 달라는 장자의 권리는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두 몫을 가질 수 있는 맏아들의 권리(신명기 21:17)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얻어 낸 권리는 아버지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권리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넘기겠다는 말 한마디로 실제 그것이 넘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27장을 보면, 에서는 여전히 맏아들의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픈 나머지 눈앞의 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넘기겠다고 말한 에서는 말의 무거움을 생각하지 않은 경솔한 사람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은 어머니 리브가와 동생 야곱이 이삭을 속여 아버지의 축복을 따내는 장면입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두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앞둔 가장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를 정해 그를 축복하곤 했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큰아들 에서를 불러 자기를 위해 사냥하여 별미(別味)를 만들어 가져오면 죽기 전에 마음껏 그를 축복하겠노라 말합니다. 이 말을 리브가가 엿들었습니다. 사실 천막이 얇아 비밀스러운 대화는 어려웠을 겁니다. 아니 이삭은 자신의 소망을 아내가 듣도록 한 지도 모릅니다.
리브가는 죽어가는 남편을 속이려 합니다. 야곱을 불러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한 말을 일러주는데, 이삭이 하지 않을 말까지 덧붙입니다. 이삭은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했는데, 리브가는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다"라고 전합니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릅니다. 이삭도 아버지를 속일 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몸에 털이 많은 형처럼 보이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자기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고 어머니가 만든 별미를 가지고 눈먼 아버지 앞에 다가간 야곱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마쳤느냐 묻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작은아들은 서로 공모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까지 동원해 거짓으로 축복을 받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사실 야곱에게는 세 번 진실을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삭이 세 번이나 의심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했을 때,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라고 물었을 때 이삭은 세 번이나 의심을 표현했고 야곱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를 세 번이나 주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호세아는 이런 행위 때문에 야곱을 비판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호세아 12:2)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늘 하나님을 거짓으로 속였고 따라서 스스로 속였다고 질타합니다. 그 속임수의 대표적인 보기로 조상 야곱을 이야기합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는 잡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속이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켑'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호세아가 보기에 야곱은 속여서 이긴 사람이고 불쌍한 도피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이 속임수를 허락하셨을까? 하나님의 이름까지 동원해 거짓말을 하는 야곱이 축복받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창세기 18:19)이라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시편 101편 기자 역시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라고 단호히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은 이삭은 야곱에게 이런 축복을 내립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축복의 요지는 첫째로 재물("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이고 둘째로 권력("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니")이었습니다. 뒤늦게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자기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는 충격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더듬거리며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고대사회에서 아버지의 축복은 회수하거나 철회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대신 이런 축복을 합니다. 여러 성경이 이 구절을 잘못 번역하고 있어서 히브리원문에 가장 충실한 King James Version을 기초로 옮겨봅니다.
"보라. 너는 기름진 땅에서 살 수도 있고, 하늘의 이슬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창세기 27:39-40) 개역개정은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라고 했지만, 이삭은 에서에게도 기름진 땅과 하늘의 이슬이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다음 말입니다. 만일 야곱이 냉혹하게 행동한다면 에서는 "[야곱이]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에서에게 가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으나 이삭은 에서에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내립니다. 오늘의 신약서신이 말하는 대로,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또] 에서에게 축복하였[습니다]."(히브리서 11:20)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을 향한 이 편애 때문에 어머니는 결국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형제간 싸움으로 두 아들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리브가는 이삭을 설득해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멀리 떠나게 합니다. 야곱에게는 "네 형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했지만 이 어머니는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마음으로 아들을 먼 곳에 보냈으나 다시는 그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 집으로 도망친 야곱은 거기서 22년을 지냅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큰 부자가 되어 귀향을 준비합니다. 거대한 식솔과 가축을 데리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은 겁에 질립니다. 너무나 두렵고 걱정이 되어 모든 대책을 세웁니다. 우선 많은 가축을 선물로 보냅니다. 그리고 일행을 두 무리로 나눕니다. 한 무리가 몰살당하면 다른 무리라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날밤 창세기의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홀로 깊은 밤에 어느 낯선 사람과 씨름합니다. 새벽이 밝아올 즈음에 그 낯선 자는 자기를 놓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야곱은 그가 자기를 축복하기 전에 절대 놓아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도록 깊은 상처를 주었으나 야곱은 끝까지 그를 놓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면서 그를 축복합니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32:28)
이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야곱과 씨름한 이는 대체 누구였습니까? 호세아는 그를 천사였다고 말합니다.(호 12:5) 유대교 현자들은 그가 에서의 수호천사였다고도 말합니다. 야곱은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와 씨름한 장소를 '브니엘', 곧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이야기가 야곱과 그 후손의 새 정체성(identity)을 알려주는 열쇠라는 점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주실 경우는 그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소명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서 이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발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이런 의미의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이름의 뜻은 연이어 벌어지는 놀라운 사건들에서 분명해집니다.
두 형제가 마지막으로 서로 본 것은 무려 22년 전이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맹세한 이후 둘은 다시는 서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에서가 경솔하고 성질이 급하며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마침내 에서와 야곱이 만났을 때 에서에 대한 우리의 모든 편견은 근거가 없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에서는 단숨에 야곱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자신의 팔로 감싸고 입을 맞추며 웁니다. 야곱도 따라 웁니다. 에서에게는 도무지 어떤 분노나 복수의 위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에서의 행동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해후 장면에서 에서가 어떻게 나올까에 집중하다 보니 사실은 야곱의 행동이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곤 합니다. 야곱은 매우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서 앞으로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33:3) 절을 했다 했습니다. 그의 모든 가족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습니다. 본문은 세 차례나 야곱과 그의 가족이 이렇게 에서에게 절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야곱이 사용한 언어 역시 이상합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에서를 '나의 주님'(adoni)이라고 부르고, 두 번이나 자신을 에서의 '종'(eved)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전날 밤, 야곱이 누군가와 씨름해서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다'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은 이제 아무에게도 엎드려 절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 이것은 리브가가 두 형제를 태에 품고 있을 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음성과도 맞지 않습니까. 또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면서 "너는 너희 형제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은 꿇을 것이다"(27:29)라고 한 것과도 맞지 않습니까. 이 예언과 축복이 참된 것이었다면 오히려 에서가 야곱에게 절을 해야 했고, 에서가 야곱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당신의 하인'이라고 낮추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22년 만에 둘이 만났을 때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더 놀랍고 이상한 일이 펼쳐집니다. 에서는 야곱이 전날 보낸 많은 가축 선물을 거절합니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33:9) 그러자 야곱은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드리는 이 선물(minchah)을 받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저는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나의 축복(birkhati)을 기꺼이 받아 주십시오."(33:10-11) KJV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서가 잘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야곱은 분명 자신이 드리는 '선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가 후에는 자기의 '축복'을 기꺼이 받아 달라고 말합니다.(영어 성서는 둘을 "gift"로, 한글성서는 둘을 '예물'이나 '선물' 한가지로 번역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 더 있습니다. 왜 에서가 "나는 넉넉하다" 했을 때 야곱은 "저는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도 한글 성서와 영어 성서들이 이 둘을 구분해서 번역하고 있지 않으나, 히브리원문에서는 에서가 "나는 넉넉하다"[yesh li rav]라고 말한 것과 달리, 야곱은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yesh li khol]이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행동보다 야곱의 언행이 더 이상함을 알아차린 독자는 비로소 이 이야기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이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도중에 놓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작은아들 야곱에게 준 두 번째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 축복은 첫 번째 축복과 달랐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자기 오빠 라반에게 야곱을 보내자고 했을 때 이삭은 이에 동의하고 먼 길을 떠나는 야곱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3-4)
이삭의 두 번째 축복은 야곱을 에서인 줄 알고 축복했던 첫 번째 축복과는 완전히 다른 축복입니다. 처음 축복은 재물("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과 권력("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니")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축복은 자손("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과 땅("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게 하시기를")이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갈 터전이 두 번째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이 '언약의 축복',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다섯 차례나(창 12:7; 13:14-18; 15:7, 18-21; 17:1-8) 그리고 자손들도 다섯 차례나(12:2; 13:16; 15:5; 17:2, 5-6)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한 번도 '땅의 비옥함'이나 그들이 '형제들을 다스릴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재물과 권세는 언약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아닙니다. 이삭의 두 번째 축복이 진짜 축복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지금 자기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사람이 바로 '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두 번째로 축복할 때는 그가 야곱인 줄 알고 축복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속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서 가로챈 축복은 본래 야곱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다른 축복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갈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의 축복을 위해서는 이제 더 이상 야곱이 변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야곱의 인생 전반기는 다른 사람이 가진 걸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 시달린 세월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 휘둘린 세월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되고 싶었습니다. 에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 안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에서가 먼저 나가자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거기서 야곱, 즉 '발꿈치를 붙잡은 자'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에서의 장자권을 죽 한 그릇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옷을 입고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눈먼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묻자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대놓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로챈 축복 역시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복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춰 사는 복, 천상의 복이었습니다.
저는 아들만 둘이 있습니다. 오래 전 언젠가 큰 아들은 밖에 나가 있고 작은 아들과 엄마 그리고 제가 거실에 함께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가 갑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나 내일부터 피아노 학원 가야돼." 갑작스러워서 "왜?" 그랬더니, "4년 전 내일, 엄마는 형을 피아노 학원에 보냈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인가 봅니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야곱이 무려 22년 만에 형 에서에게 정확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라고 말하는 형에게 동생은 "아닙니다, 형님...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저는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나의 '축복'을 기꺼이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그때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축복, 정확히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원래 에서의 것이었던 그 축복을 본래 그 축복이 향했어야 했던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본래 형 에서에게 내리려던 그 축복을 당사자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날 밤 일어난 그 씨름 경기가 무슨 의미인지 분명해집니다. 야곱은 자신의 실존적 진실과 싸웠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그 낯선 자는 그가 더 이상 야곱, 즉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자' 혹은 '속이는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도 싸우고 사람들과 싸워 이길 자'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인습적인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부자가 될 것이다' 혹은 '너는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낯선 이는 야곱에게 '과거에는 네가 에서가 되려고 싸웠다. 그러나 이제 너는 너 자신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네가 에서의 발꿈치를 잡으려 싸웠다면 이제 너는 하나님의 손을 잡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너는 에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의지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밤중의 씨름에서 야곱은 더 이상 에서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자기의 실존적 진실과 씨름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진리의 거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제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고유한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고유한 이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신의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중심 주제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언약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선택한 언약 백성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지위, 재물과 권력을 복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다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행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시편 105:1)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마태 22:32)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야곱처럼 자기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자신의 얼굴, 자기의 이름, 자기의 소명,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축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더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기 위해 속고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도 겨루어서 이기고 사람들과도 겨루어서 이기는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고 돌보는 자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2023년 4월 30일 이화여대 대학교회 주일예배에서 장윤재 목사가 전한 설교문 전문입니다. 설교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