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추모 설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안재웅 목사(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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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안재웅 목사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복음 7장 16-18절, 새번역)

오늘 우리는 김용복 목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분들이 김 목사를 추모하는 데는 아마도 그가 학문에 쏟은 남다른 열정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민중에 대한 애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용복 선생의 레거시(Legacy)를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남긴 삶의 궤적을 재조명해야 하겠습니다. 학문의 깊이를 재평가해야 하겠습니다. 민중신학의 깊이를 재탐구해야 하겠습니다. 의연하게 살았던 삶을 재해석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어지는 시간에 '김용복 박사 추모문집 출판기념회'를 가지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김용복 박사의 레거시를 본격적으로 다듬어내는 첫 시동이 걸린 셈입니다.

김 선생의 레거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장 19절 이하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라는 기사입니다. 요한은 이들의 물음에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다만,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라고 예상 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사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의 소리, 고난받는 사람들의 소리, 외국인 노동자들의 소리, 힘없고 억눌린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정의가 짓밟히는 소리가 마치 빈 들에서의 외침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광야의 소리를 외친 분이 바로 김용복 선생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 1:29) 이 메시아 고백을 김 선생은 필생의 신학적 연구 과제로 삼았습니다. 김용복 선생은 『메시아와 민중』(Messiah and Minjung, 1992)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메시아는 민중의 해방자이고 구세주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CCA-URM(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국) 실무책임을 맡아 일할 때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북미주와 유럽에서는 신학교의 참고도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민중신학에 관련한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 필수적인 탐구 문헌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나라에서는 도서 구입의 어려움 때문에 복사본을 만들어 학습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명저를 출판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면, 김 선생 역시 이와 비견되는 현장에서 야성(野聲)을 외친 분입니다.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았듯이 김 선생도 매우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산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김 선생의 레거시는 사도 바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감옥에 구금되어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교도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떠버리'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성서의 편집 과정을 거쳐 신약성서의 바울서신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는 신학적 논리를 정연하게 피력한 위대한 신학사상으로 한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 역시 요동치는 역사의 물결 속에서 미행과 감시를 받으며 사셨습니다. 당국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사를 받는 동안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수모와 멸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의 경험이 민중신학의 단면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여러 에큐메니컬 기구들이 주최하는 국제 모임에 강사로 초청받아 그의 지성을 유감없이 개진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 선생과 대화하거나 강연을 들으면서 그의 풍부한 지적 능력에 감동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여러 새로운 개념과 논리 전개는 우리들에게 풍부한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많은 신학적 신조어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이나 김 선생의 에큐메니컬 모임 참가를 위한 여행은 많은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이나 김 선생의 글들은 역사적인 문헌으로 남아 우리들의 삶에 길라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김 선생의 레거시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리처드 쇼울(Richard Shaull) 교수와 연계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쇼울은 미국장로회 선교사로 브라질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는 남미의 해방신학을 다듬어내는 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특히 남미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혁명의 내면을 잘 파악한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저서 『혁명과의 대결』(Encounter with Revolution, 1955)을 통해 우리는 쇼울이 자신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그는 획기적인 신학적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바로 미국은 제3세계를 착취하는 경제 구조의 틀로부터 죽어야 하고 새로운 미국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부활이 온다는 것입니다.

쇼울은 김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입니다. 쇼울의 학문적 관점은 김 선생이 학위논문을 보완하고 정리해서 73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유작으로 남긴 『3‧1독립운동의 민중해석학』(A Minjung Hermeneutics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2021)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김 선생은 'Messianic koinonia'가 민중 해방의 모티브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의 변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koinonia'를 통해서 힘을 모으고 'Messianic koinonia'로 이어짐으로써 'Messianic Kingdom'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김 선생의 레거시는 정약용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 선생은 기미 3‧1독립운동을 연구 주제로 삼으면서 동학사상에 깊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천민 계층들이 양반 계급에 저항한 동학농민운동이 3‧1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모티브가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목민사상에 심취하였습니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계된 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 동안 지냈습니다. 이때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를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로 남겼습니다. 김용복 선생은 특히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개혁의 과제로 (1)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 (2) 지방행정의 쇄신, (3) 농민의 토지 균점, (4)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5) 노비제의 폐지 등에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또한 (1) 농민의 실태, (2) 서리의 부정, (3) 토호의 작폐, (4) 도서민의 생활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친 데 대해 통쾌한 입장을 보이게 됩니다. 김 선생이 한때 '목민학원'이라는 학교법인을 인가받아 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것도 정약용의 사상을 아태생명학대학원대학교에서 폭넓게 연구하려는 구상이었다고 봅니다.

김 선생의 성품을 말할 때 독자성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논리를 다듬어내고, 단도직입적인 결단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많은 석학과 신학자들이 있지만 유일하게 정약용을 추종한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유유상종이라 하겠습니다.

김용복 선생의 레거시는 이 모든 것보다도 그리스도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성서 연구를 통한 그리스도론에 몰두하면서 'Messianic Kingdom'을 추구하는 열정을 보였던 것도 그의 학문적 레거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목입니다. 김 선생은 끝까지 신학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현인이라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뛰어난 학자요, 사상가요, 논객이요, 수행자라 하겠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독특한 대학 총장이었고, 특임교수요, 유별난 연구원장이며 학회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자료센터인 DAGA의 초대 책임자로 다국적기업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연구논문을 제3세계 민중운동가들에게 꾸준히 제공하였습니다. 아시아신학자협의회인 CATS의 초대 공동대표로 아시아 신학자들의 모임을 폭넓게 주도하였습니다. 아시아생명평화회의인 'Peace for Life'의 초대 대표로 악의 제국(Evil Empire)을 넘어서야 평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며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역설하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김용복 선생이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민중과 메시아사상', '평화통일과 정의실현', '복지와 평등사회 구현', '생명과 지구적 연대' 등을 꾸준히 연구과제로 삼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분들이 함께한 자리입니다.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복이 김매련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본 글은 김용복 목사 1주기 추모예식 설교문 전문입니다. 설교자 안재웅 목사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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