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신명기 5:1-5, 16, 에베소서 6:1-4, 마가복음 3:31-35
설교문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 5월 8일은 어버이날,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자 성년의 날, 그리고 5월 21일은 '둘(2)이 하나(1)가 되는' 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 가족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빠 생각, 언니 생각, 동생 생각, 남편 생각, 아내 생각, 엄마 생각, 아빠 생각... 한국인들에게 가족은 무엇일까요?
한국인들의 정서(情緖)에서 가족이란 그리움인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3대 동요로는 <고향의 봄>(이원수), <오빠 생각>(최순애), 그리고 <섬집 아기>(한인현)를 들 수 있는데, 그 안에 모두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를 지은 이원수가 <오빠 생각>을 지은 최순애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 울고 버꾹 버꾹 버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 생각>은 최순애가 겨우 12살 소녀일 때 지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집이라 오빠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오빠는 고향에 돌아왔으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본 순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서울로 가 소파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왔는데, 집에 올 때마다 늘 선물을 사 오곤 했습니다.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다 줄게'라고 말하고 갔는데,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난 오빠가 기러기, 귀뚜라미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질 않습니다.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습니다. 과수원집 딸 최순애는 오빠를 그리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울다가 돌아와 쓴 노래가 바로 <오빠 생각>입니다.
한인현의 <섬집 아기>는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작곡되어 아기를 기르는 엄마들의 자장가로 많이 불렸지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요즘 같으면 이 엄마는 아동 방치 혐의로 경찰에 잡혀가겠지만, 이 노래는 2절까지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엄마와 아기가 만납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한국인의 정서(情緖)에 '엄마'는 그리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가 엄마라고들 하지만 엄마는 '그리움'입니다. 동화작가 정채봉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런 시를 적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 엄마가 /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 단 5분 /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 원이 없겠다 / 얼른 얼마 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 한 번만이라도 / 엄마! /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 숨겨 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정채봉,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반나절, 아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만이라도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는 아들의 소원은 가슴이 아프다 못해 저립니다.
엄마만 그리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평생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며 살았던 윤석중 시인은 아빠와 아기 사이, 그들의 본능적인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재치있게 그렸습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먼 길>)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봐야 아빠는 떠날 수 있겠는데, 먼 길 가시는 아빠가 걱정되는지 아기가 말똥말똥 잠을 안 잡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텐데 아기는 어떻게 스스로 알았을까요. 아기와 아빠가 나누는 교감 속에 세상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됩니다.
"엄만 / 내가 왜 좋아? // 그냥...... // 넌 왜 / 엄마가 좋아 // 그냥......." 세상에서 제일 짧은 문삼석 시인의 <그냥>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계인 엄마와 자식 사이, 부모와 자식 그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를 말해줍니다.
성서는 이런 엄마와 아빠를 '공경하라'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12) 출애굽기에 처음 나오는 십계명의 제5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명인데, '부모 공경'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십계명의 이 제5계명이 시대를 거치면서 단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롭게 해석되어 다시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 신명기 5:16은 출애굽기에서 처음 선포된 제5계명의 재해석이고 새로운 선포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출애굽기에 나온 제5계명은 노역의 땅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Exodus) 제1세대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 다시 나오는 제5계명은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출애굽 제1세대를 부모로 둔, 그러니까 그들에 의해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제2세대에게 다시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제5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모세가 전하는 형식을 따르며("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나아가 부모를 공경할 때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출애굽기의 원래 선포에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라고 '생명'과 함께 '복'을 약속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뀜에 따라 십계명의 제5계명은 새롭게 다시 선포되었습니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제5계명은 다시 인용되면서 그 시대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해석되어 선포됩니다. 오늘 신약서신의 본문으로 삼은 에베소서 6장 1~4절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보이십니까? 들리십니까? 차이가 보이고 들리십니까?
바울이 살던 시대는 로마제국의 시대입니다. 로마제국 사회는 강력한 가부장제(家父長制, patriarchy) 사회였습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모든 권리를 쥐고 있었습니다. 가족 구성원이라 하면 아내들, 자녀들, 노예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집안의 노예였다가 해방된 이들이나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던 식솔(食率)도 포함됩니다. 가장은 이 모든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아내인]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베드로전서 3:6) 가장은 아내들에게도 '주'(주인, 퀴리오스)였습니다. 바울이 "내가...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었다]"(갈라디아서 4:1-2)라고 말한 것 같이, 당시에 자녀들은 노예와 비견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당시의 주택을 고고학적으로 연구해보면 어린 자녀들은 노예들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노예인 유모의 돌봄 아래 성장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통용되던 '가정규례'(家庭規例, 독일어 Haustafel, 영어 Household Code)가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제1권에서 가정의 기초 단위가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자녀들"라고 말하는데, 이 세 쌍의 관계는 평등의 관계가 아니라 불평등의 관계였습니다. 위아래가 분명한 위계질서 아래서 어떻게 아래 사람(노예, 아내, 자녀)이 윗사람(주인, 남편, 아버지)에게 올바로 처신할 것인가를 규정해 놓은 지침이 로마 시대의 가정규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를 살던 바울은 갑자기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호명(呼名), 즉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을 책임 있는 행동의 주체로 불러 세운다는 뜻입니다. 항상 수동적인 역할을 하던 자녀들을 불러세운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하라는 원어로 '휘파쿠오'(ὺπακούω)인데 문자적으로는 영어의 "under-stand"와 비슷한 의미로 '밑에 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무런 전제 없는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라고 했습니다. 전제는 '주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의 순종이지, 당대 통용되던 가부장적 개념에서의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범위 안에서의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은 전통적이고 유교적인 의미에서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십계명의 제5계명을 재해석하여 자기 시대에 선포합니다.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말한 다음에 이 말을 덧붙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당시 '아비들'(πατερες, 파테레스)은 절대적인 권세를 지닌 존재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녀를 감옥에 보내거나, 노예로 팔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신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아버지들에게 바울은 감히 자녀를 '노엽게'(παροργίξω, 파로르기조), 즉 '화나게' 혹은 '성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당대 아무 대항도, 대꾸도 하지 못하던 자녀들의 귀에 들으면 상당히 급진적인 권면입니다. 쉽게 말해서 바울은 지금 아비들이라고 해서 자녀들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곧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알려진 가정규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에서 적극 재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합니다. 에베소서(5:22-33)만이 아니라 골로새서(3:18-4:1) 그리고 디모데전서(2:8-15; 5:1-2; 6:1-2)와 디도서(2:1-3:8)에서 당시 사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새로운 가정규례를 선포합니다. 바울은 우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5)라고 말하고, 또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로새서 3:19)라고 명령합니다. 이 시대에 남편에게 아내 사랑을 요구하는 규범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 남편을 신처럼 섬겨야 했던 아내들에게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만 "주께 하듯"(에베소서 5:22), "주 안에서"(골로새서 3:18)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특히 부부와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순종' 혹은 '복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가족 안의 질서를 강조하긴 하지만, '서로' 복종하고,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라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서로 복종하고, 섬기고, 사랑하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가정규례에서의 핵심적인 가치와 원리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그 사랑과 섬김과 자기 비움의 원리였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혁명적인 가족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길 정도로 끔찍한 효자이셨지만,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읽은 것처럼 단순히 피를 나눴다고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진정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고 계실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았으나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 3:35)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은 이 말씀을 듣고 크게 낙심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새롭게 정의 내리신 가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복종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세상의 가족은 인간의 피로 맺어지지만, 하나님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집니다.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갈라진 것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에베소서 2:16)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새 가족이 맺어집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5월 가정의 달이 되면 떠오르는 노래입니다.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의 가사이지요. 이 곡이 쓰인 지 40년 지나 미국엔 남북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북군, 남군 할 것 없이 모든 병사가 이 노래를 부르니 군 당국은 이 노래로 병사들이 향수에 젖어 울적해질까 봐 이 곡을 금지곡으로 삼기도 했다 합니다. 홈, 가정이라는 그 말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가정은 편안하고 안전한 '홈 스위트 홈'일까요?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오래 머물다가는 죽음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여성신학이 일어나던 1960년에는 매 39초마다 한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가정은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많은 아이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부모에 의해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 현실의 가정은 '홈 스위트 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족의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통계청 발표를 보니 작년 기준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3.4%입니다. 우리나라 가구의 3분의 1이 1인 가구라는 말입니다. 2050년이 되면 39.6%, 즉 40%에 이를 전망입니다. 대신 그동안의 전통적인 가구 형태인 4인 가족 가구는 작년에 이미 1인 가구보다 적은 31.1%로 떨어졌는데, 2050년이 되면 14.7%로 급감합니다. 가족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한 부모 가족, 재혼 가족, 무자녀 가족, 자녀입양 가족, 미혼 부모 가족, 결혼하지 않고 사는 동거 가족, 싱글(독신) 가족, 독거노인 가족, 소년소녀가장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동성 가족 등 지금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는 걸 목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가족의 붕괴라고 한탄하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 국민이 전통적 가족의 폐해였던 가부장 제도나 남녀 차별에 대한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가정은 안전한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정은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살면서 어떤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있다면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에베소서 6:4) 했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낙심할까 함이라"(골로새서 3:21) 우려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기의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시인이 말했지요.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나태주, <달팽이는 느려도 늦지 않다>) 부모의 일관되지 않은 양육 태도나 과잉보호, 그리고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좌지우지하는 무례함이 자녀들을 병들게 하고, 노엽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녀를 나의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을, 내 삶을 자녀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유혹을,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야'라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위했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녀들이 내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부모는 매사에 자녀들을 존중함으로써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십자가 앞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모도 부모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자녀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아이가 쓴 시입니다. 제목은 <아빠가 되면>입니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실 때 / 아빠는 아직 철이 없으신 것 같다 // 아빠가 해도 될 일을 / 왜 엄마한테 시키실까? // 삐지고 화낼 때는 / 아기 같다 // 엄마가 스트레스 받아서 / 아플까 봐 걱정이다 // 나중에 아빠가 되면 / 아빠처럼 안 해야겠다."(윤민근, <아빠가 되면>) '어른아이'가 있고 '아이어른'이 있다고 하지요. 어른아이인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어른 시인의 마음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특히 엄마를 걱정하는 아들의 마음이 더없이 예쁩니다. 아빠도 아빠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부모도 부모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자 또 숙제입니다. 이 숙제는 여간 어려운 숙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주 안에서' 서로 복종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내가 버림받지 않을까' 혹은 '내가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상처가 있습니다. 낸시 뉴턴 베리어의 <원초적 상처>는 입양에 관한 책입니다. 입양인들은 입양 부모의 따뜻한 품에 안기지만 그 전에 겪은 '버림당함'이라는 경험이 '원초적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또다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떱니다. 이 책에서 이 문장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친(親)생모는 자식을 포기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입양모는 친생모를 적절히 대신하는 데 다소 실패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들은 태어난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낀다." 태어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인데 어떻게 그것이 죄책감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사야 49장은 어머니의 품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이사야 49:15) 인간은 혹시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으시는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다"(시편27:10) 했습니다. 어느 교회의 베이비박스(생명의 상자) 옆에 적힌 성경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은 내 영혼을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느낌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 1:11)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의 존재 자체를 내가 기뻐한다.' 교우 여러분, 이 사랑의 '주 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형제는 자매를, 자매를 형제를 서로 기뻐하는, '그냥' 좋아하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정 모두 이루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저희에게 세상에서 / 가장 귀한 부모님을 허락하시고 / 그 부모님을 통해 / 생명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어려서는 품에 안아 길러주셨고 / 자라서는 혹시 그릇된 길로 나갈까 봐 / 마음 졸이며 / 사랑으로 기다리셨던 부모님!... // 한평생 자식 위해 모든 것을 주셨기에 / 이제는 더 줄 것이 없어 / 가슴 아파하며 눈물지으시는 / 부모님을 축복하여 주소서. // 이제 부모님의 / 믿음과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 빛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부모님의 남은 생을 축복하시어 / 영육의 강건함을 허락해주시고, / 자식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도록 / 최선의 공경과 효도로 / 기쁨을 안겨드리는 자녀 되게 하소서."(이름 없는 이, <부모님을 위한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 글은 2023년 5월 14일 이화여대 대학교회 주일예배에서 장윤재 목사가 전한 설교문 전문입니다. 설교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